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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3.1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정치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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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11)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이승만을 지지하는 하와이 교포들은 그에게 이듬해 1월에 열리는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할 것을 권유했다. 하와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에서도 이승만을 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선출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국 본토로 향했다. 동부로 가는 길에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안창호를 만나고 뉴욕을 거쳐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그곳에서 서재필을 비롯, 정한경, 장택상, 민규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서재필은 파리에 가 봤자 강화회의에 참석할 수도 없고 참석한다해도 별 효과를 거두기 힘든 헛수고가 될 것이니 차라리 여기서 그 자금으로 영문 잡지를 발간, 지면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기를 대표로 보낸 교포들의 뜻을 거스릴 수 없어 파리로 향하기 전에 미 전역에 흩어져 사는  교포들을 필라델피아로 모이게 하여 <한인 대표자회의>를 가진 후  시가 행진을 하기로 했다. 이 계획은 때마침 진해진 3.1운동 소식에 탄력을 받게 된다. 


각지에서 150여명의 한인 대표들이 모였다. 4월 14일에서 16일까지 3일 연속으로  진행된 이 회의에서는 5개 결의안을 채택하여 미국 정부와 국민, 한국 임시정부, 파리 강화회의, 그리고 일본 지식인들에게도 보냈다.  마지막 날에는 유서깊은 미국의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한 다음,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민국과 미국을 위한 만세삼창으로 마무리했다. 이 미국판 만세운동은 유태계 독일 출신 베네딕트 기자에 의해 대회 결의안과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AP와 UP에 보도되었다.  또한 이 대회를 계기로 한국통신부가 설립되고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었으며 이제 미주지역에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 정부가 세워진다. 임시 정부마다 프린스턴의 국제학 박사학위를 소유한 이승만에게 주목한다. 서로 정상급 지도자 칭호를 주며 모셔가려한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1, 불라디보스톡에 세워진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이승만은 국무급외무총장으로 추대된다.  참고로 이 때 손병희가 대통령으로, 박용효가 부통령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4월 10일에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상해에 세워진 임시 정부에서는 이승만에게 국무총리직을, 그리고 4월 23일에 국내에 세워진 한성정부에서는 그를 집정관총재라는 직함을 주었다. 


어쨋든 이승만에게 3.1운동은 하와이에 망명한 교육자라는 허물을 벗고 이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로 탈바꿈한 계기가 되었다. 비록 그 한 나라라는 것이 국제적으로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 임시 정부였지만.  


이 높디 높은 직책 중에서 이승만은 어떤 직책을 수락했을까? 그의 선택은 간단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에 상관없이 가장 정통성 있어 보이는 정부를 택했다. 그 결과  고국의 수도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수립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직을 수락하기에 이른다. 그런 후 그는 워싱턴 D.C.에 본부를 설치하고 활동을 개시한다. 미국에서 활동 하려면 모든 것에 영어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라는 Republic of Korea로, 집정관총재는 President로. 그리고 1919년 9월 11일, 상해임시정부, 한성정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는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된다. 


세 임시 정부가 통합되는 과정은 여기서 생략하고 합의된 5개조항은 다음과 같다. 1) 상해와 노령(러시아 영토)에서 설립한 정부들은 일체 작소하고, 오직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함이다. 2) 정부의 위치는 아직 상해에 둘 것이니 각지에 연락이 비교적 편리한 까닭이다. 3)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의 제도와 인선을 작소한 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제도와 그 인선을 채용하되, 상해에서 수립 이래 실시한 행정은 그대로 유효를 인정할 것이다. 4)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 할 것이니, 독립선언 이후에 각지를 원만히 대표하여 설립된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살리기 위함이다. 5) 현재 정부 각원은 일제히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선택한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할 것이다.


이렇게 정부의 뼈대를 세운 후 이대통령은 미국을 위시한 영국, 불란서, 이탈리아 등 열강에 완벽한 자율적 민주정부인 대한 공화국이 탄생되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일본의 천황 앞으로도 국서를 발송한다. 국서의 골자는 한반도에 적법한 대한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므로 일본은 이를 인정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일본군대와 관리들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그런 후 자신은 임병직 비서를 데리고 8개월간 미국 각 주요도시를 순방했다. 


일본은 이승만 머리에 30만불의 현상금을 걸고 납치 또는 암살을 노렸다. 그러니 상해를 가야할텐데 미국과 중국 양국에서 여권과 비자가 쉽게 나올리 없었다. 그래서 밀항을 시도했다. 호놀룰루에서 장의사를 하는 미국 친구의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의 집에 숨어서 일본에 들르지 않고 상해로 직행하는 배를 기다렸다. 항해사를 매수한 장의사 친구는 이승만을 중국인 시체가 담긴 관 옆에 숨겨 주었다. 중국 옷으로 변장한 이승만은 그 당시의 심정을 이런 시로 표현했다. 


민국(民國) 이년(二年) 동짓달 / 하와이에서 남 몰래 배를 탔네 / 겹겹 판자문 속에 난로가 따뜻하고 / 사면이 철벽이라 칠흙같이 어두웠지 / 내일부터는 산천도 아득할텐데 / 이 밤 따라 세월이 지루하구나 / 태평양 위를 두둥실 떠가니 / 이 가운데 황천이 있음을 그 누가 알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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