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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프란체스카에게 건넨 결혼 기념품 참빗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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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15>


붐비는 식당에서 우연히 모녀와 합석해서 저녁 식사를 하고.  그들 중  딸은 의외로 한국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고 하여 자연스런 대화를 나눴고.   그 후  우남의 인터뷰 신문 기사를 오려  주었고. 그 호감의 답례로 우남은 그녀에게 차를 대접했고…  그만하면 하루의 일과를 간단히 적어 두는 일기장에 모녀에 관한 이야기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1933년 2월 21일자 Log Book of S. R.에 적힌 이름들은 그 날 점심을 같이 한 국제회의를 참관했던 두 미국 여성 이름뿐 도너양의 이름은 없었다.   프란체스카의 애칭 Fanny라는 이름이 우남의 일기장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두어달 후인 5월 9일. 그마저도  그 녀의 도움으로 전에 남에게 꿔 준 돈을 베를린의 독일 은행을 통해 받을 수 있었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프란체스카 역시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로 만남은 커녕 편지로 왕래하는 것조차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American Express회사를 수신처로 해서 어머니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월 7일에 우남이 모스크바로 떠나는 길에  비자를 받기 위해 빈에 들렀다. 이 때부터 둘은 본격적인 데이트를 하면서 진지한 대화를 니눴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비엔나 명소를 찾아다니며 즐겼다. 고색창연한 쉰브른 궁도 돌아보고, 비엔나 시가지가 눈 앞에 펼쳐지는 호텔 쉴로스도 가 보았고, 에르메스 빌라도 방문하면서 일주일 동안 데이트를 즐기며 아마도 미래를 약속하였을 것이다. 7월 15일 이승만이 모스크바로 출발할 때엔 기차역까지 따라나온 프란체스카가 손을 흔들고 있었으니까. 이승만은 이 일주일을 그의 일기에 The Vienna Affair라고 적었으니까. 


4개국 항일 연대. 즉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한국이 힘을 합쳐 일본의 도발을 막겠다는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한 우남. 중국의 국제연맹 상주대표 후수쩌와 미국 총영사 길버트와는 이미 협의가 이뤄진 일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협약을 받으러 온 여행이다. 그러나 그곳에 먼저 와서 상업 협상을 벌이던  일본인의 방해로 37시간 30분만에 황급히 쫓겨났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비엔나에 들러 프란체스카를 한번 더 만난다. 그리고 결혼할 것을 약속하며 그녀를 워싱턴으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이듬해 1월부터 그녀의 입국수속을 시작했다. 그러나 비엔나 주재 미국 영사관에서는 프란체스카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신청한지 6개월이 지나도 비자가 발급되지 않자 이승만은 그의 주특기인 인맥을 동원했다. 7월 22일 미국무부 정치고문 Stanley Hornbeck을 찾아간 것. 그래서 그해 10월 4일에 프란체스카는 미국으로 건너 올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가 뉴욕 항에 도착한 다음 날 뉴욕 시청에 들러 결혼 허가증을 얻은 후 10월 8일 결혼식을 치렀다. 장소는 뉴욕 Lexington Ave.에 있는 Hotel Montclair. 이곳에 장기 투숙하고 있던 프린스턴 대학 동창 킴벌랜드 대령 부부가 이들의 결혼식을 적극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 호텔 특별실에서 식을 치렀다.


신랑 이승만 만59세 (환갑!! 그리고 고인이 된 장인과 동갑), 신부 프란체스카 도더 리 34세. Best men은 킴벌랜드 대령과 또 하나의 프린스턴 동창 레이머 목사. 들러리는 남궁염씨와 킴벌랜드 대령 부인. 주례는 하와이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같이 한 윤병구 목사와 John Holmes 목사가 공동으로 맡았다. 이로써  망명 정치가와 맞춤형 비서의 재질을 겸비한 신랑 신부는 둘 다 한번 씩 이혼한 아픔을 뒤로 하고 한국 독립을 위한 영원한 동지가 된다. 


장모는 ‘나이 듬직하고 젊잖아보이는 동양 신사라 안심하고 겸상을 허락했는데…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가업을 이을 영리한 막내딸을 변변한 나라도 없는 그 먼 곳으로 시집보내 온갖 고초를 자초하게 될 줄이야...’ 라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런데 프란체스카는 훗날 며느리에게 어머니가 알았다면 아마도 기절하셨을 비밀 한 가지를 털어 놓았다. 결혼식 비용은 물론 결혼 반지까지 신부가 전액 부담했다는 사실. 신랑에게 받은 것은 제주산 진주 반지와  안주머니에 늘 품고 다니던 어머니의 유품 참빗이 전부였다는 사실.     


신랑은 신부에게 이 참빗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당 훈장의 딸로 태어나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 몰래 배재학당에 입학한 사실. 그러나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친 댓가로 받은 강사료를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흘리던 어머니의 눈물. 상투를 자르고 뵙자 조상님들께 죄송해서 흐느끼시던 어머니는 우남이 상투를 자른 이듬해 1896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실. 그 때부터 유품으로 품에 품고 다니던 것이 바로 이 참빗이라고 말하며 신부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 하와이로 망명했어. 거기엔 한국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기 때문이지. 도착하면서 우선 그들을 만나기 위해 사탕수수 농장을 돌아 보았지. 거기서 어른들이 값싼 노동에 시달리는 것도 속상한데 어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부리는 거야. 한참 배워야 할 나이인데 말이지. 그래서 부모들에게 떼쓰듯이 허락받고 데려왔지. 지금 공부시키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당신들보다 나은 삶을 주려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기숙사를 만들어 잘 교육시킬테니 나를 믿고 맡기라면서 반 강제로 데려왔어. 이렇게 모은 아이들을 우선 목욕부터 시키고 이 참빗으로 머리를 빗겨 주는데, 어휴, 이와 서캐가 무더기로 나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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