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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정복왕 윌리엄이 결코 정복되지 않는 영국의 초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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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은 50cm이지만 길이는 무려 70미터, 그리고 무게는 자그마치 350kg이나 되는 자수 벽걸이 바이외 태피스트리 (Bayeux Tapestry). 프랑스가 자랑하고 영국이 제발 한번만이라도 빌려 달라고 애걸하는 중세의 유품이다. 마크롱이 조건을 걸고 빌려주마 했다는데 실제로 이뤄졌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이 작품은 노르망디의 바이외 지역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현재 그곳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1066년 잉글랜드에 노르망디 왕조가 세워지기까지의 역사적 실화 56개 장면을 화려한 색실을 사용하여 수놓은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1064년 부터 시작하여 헤이스팅스 전투가 벌어진 1066년 10월 14일까지 일어난 사건들이다. 군데군데 수놓아진 그림 설명은 라틴어. 윌리엄의 이복 동생으로 바이외의 주교이기도한 오도(Odo)가 주도하고 재능 있는 수녀들이 한땀한땀 떠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윌리엄의 침략을 정당화 시키고 그의 행적을 찬양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런데 이런 의도된 찬양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섬나라인 영국이 유럽 대륙의 여러 민족과 섞이면서 진정한 유럽 국가로 발돋음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앞으로는 결코 정복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는 초석을 놓아 준, 영국 역사상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남쪽으로 들어와 점령하자 북부에 사는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윌리엄은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 약 10만명을 학살하고 북부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정도로 초토화시켰다. 그런 후 언제 어디서 또 일어날지 모르는 반역에 대비, 아예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해 버렸다. 그리고 이 토지를 자기를 위해 싸워 준 노르망디 출신의 공신들에게 나눠주면서 그 영지 내의 재판권(sac and soc)까지 딸려 주었다. 귀족뿐 아니라 교회 주교나 수도원장 등 모든 공직자도 노르만인으로 대체되었다. 대륙의 봉건제를 그대로 들여와 실시한 것.

그러나 대륙의 봉건제와는 달리 윌리엄은 강력한 중앙 집권적 봉건제라고 할 수 있는 솔즈베리 서약을 받아낸다. 즉 대제후 밑에 있는 봉신들을 솔즈베리에 소집, 직속 주군인 대제후보다는 국왕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라는 충성 서약을 받은 것. 결과적으로 이 서약으로 인해 지방 권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더 이상의 반란은 없어졌다. 적어도 윌리엄 생전에는.

그런 후 이들에게서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전문가들을 전국에 파견해서 모든 마을과 농가를 일일이 돌면서 인구와 토지는 물론 사유재산까지 철저히 조사했다. 토지 면적과 그에 따른 노예수, 가축수, 시설물, 연장까지 일일이 세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지 대장을 둠스데이북이라고 한다. 우리가 종말이라고 알고 있는 둠스데이와는 상관없이 이 책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둠스데이라고 불리우는 방에 소장되었기 때문에 붙여 진 이름이다.

그는 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곳곳에 성채를 짓는 축성 사업을 벌였다. 그 때 생긴 것이 런던 타워. 그는 런던을 중심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는데 런던을 보호할 겸 자신의 권력도 과시할 겸 어마어마하게 크고 수려한 성채로 지었는데 이것이 노르만 왕조의 첫 왕궁이기도하다. 그 중 한가운데 서 있는 높이 28미터의 White Tower는 윌리엄을 비롯, 여러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1240년 핸리 3세가 이 건물에 흰색칠을 하는 바람에 붙여진 이름이고.

영국의 역사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런던 타워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이 크다. 주로 정치범, 정적들을 가두었다 죽이는 감옥이 주는 어두운 인상. 실제로 15세기에는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이, 16세기에는 핸리 8세의 부인들이 줄줄이 갇혀있다 죽어나간 곳이기 때문이다. 앤 블린, 캐서린 하워드, 제인 그레이 왕비들이 Tower Green에 갇혔다가 처형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갇혔었지만 풀려나 여왕이 된다. 그외의 수많은 정적들이 배신자의 문(Traitor’s Gate)을 통해 들어와 처형된 곳은 Bloody Tower라는 옆 건물.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빠르게 발전한 것 중의 하나가 영어였다. 그 당시 상류사회에서 쓰인 언어는 Norman French였다. 아, 물론 학교나 교회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되었지만 라틴어는 말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글쓰기 위한 언어였고 궁정이나 법정 또는 의회의 공식어는 Anglo French. 따라서 이 시기에 약 1만개의 프랑스 어휘가 영어에 흡수되어 오늘날의 영어로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이전에는 왕이라면 king뿐이었는데 그 후로는 royal, regal, sovereign 등 다양한 단어가 영어로 흡수된 것. 그래서 영어를 써야하는 우리 교포들에게는 더 고달픈 삶이 …

전번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땅의 크기로 보나 사람 숫자로 보나 노르만 공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영국을 어떻게 정복하고 평정하여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윌리엄이 능력자라 해도 말이지. 그는 능력자이기 이전에 충동적이고 다혈질이고 난폭한 면이 있는데. 이 의문은 평생을 두고, 아니 죽을 때까지 곁을 지켜 준 랑프랑 수도사의 존재를 알고 나면 금새 풀린다. 아하, 그래서…
이탈리아 출신 수도사인 랑프랑은 노르만 공국 시절부터 윌리엄을 위한 조언과 보살핌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출중한 학문과 지식으로 윌리엄을 가르치고 그의 겸손으로 윌리엄의 다혈질을 잠재워 주었다. 아마도 윌리엄에게 랑프랑이라는 지적 완충지대가 없었더라면 유럽 역사 속에서의 윌리엄은 그리 큰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왕인 동시에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기도 하다. 노르망디 공작은 프랑스 왕의 봉신이고. 따라서 잉글랜드왕은 프랑스 왕의 봉신이 되는 셈. 두 나라간의 신경전은 이 때부터 싻이 트고 먼 훗날 백년전쟁에서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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