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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이승만 되살리기, 추앙, 또는 미화가 아닌 제대로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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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1>


이승만. 구한말에 태어나 문명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오늘의  자랑스런 우리 대한민국을 세운 초대 대통령이다. 하지만 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극과극의 평가를 받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 것이다. 거창한 독립운동으로 시작한 그의 정치 인생이지만  물러나야 때를 놓쳤기 때문에, 아니지, 놓치기 보다는 미뤘기 때문이겠지,  초라한 하야로 마무리 지은 것을 보면 그의 인생도 극에서 극을 달린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직을 사임하겠다는 하야 성명. 독재자의 입에서 쉽게 나올 있는 내용은 아니다. 이튿날 경무대를 떠날 ,  거리로 몰려나와 눈물을 흘리며 격려의 박수로 환송하던 군중. 역시 어제의  데모 집단은 아니었고.  불과 60 전만해도  대한민국은 이렇게 동방예의지국의 품위를 갖추면서 그렇게 순수했고 정겨웠다.

 

유튭에 나온 탈북자가 이런 말을 했다. 남한은 줄을 서서 이리 살고 북한은 줄을 잘못 서서 저리 사는 것이라고.  맞다.  그런데 애초에 줄을 사람은 초대 대통령이다.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줄을 있었는지 궁금해 졌다.  그리고 한문으로 시작하여 영어로 받은 교육 수준,  동과 서를 어우르는 해박한 지식, 탁월한 통솔력,  애국심, 세계 정세의 흐름을 미리 읽는 예지력,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십역대 대통령님들과 비교해 봐도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는데 그렇게 평가절하되는지도 궁금해 졌다.

 

그래서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제와서 분을 추앙하거나 미화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알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런 이유로 우남 시리즈를 시작해 보려 한다. 가끔 날아드는 소리도 들릴테지만.

 

우남은 1875(고종 12)에 황해도 평산군에서 청빈한 왕족 가문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위의 두 형이 모두 홍역을 앓다 죽는 바람에 6대손 와아들이 되었다. 왕족 가문인데 왠 청빈? 하겠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남이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 손이긴 한데 서열에서 밀린다. 양녕대군의 다섯째 아들 이흔의 서자 계통이기 때문. 그래서 오랜동안 벼슬길은 막히고 그래도 양반이라고 아무 일이나 할 수 없으니 가난할 수 밖에.  이런 환경 속에서 민주주의 사상을 일찍 터득한 모양인 듯.

아버지 경선공은 가난의 원인을 조상묘를 잘못 쓴 탓이라는 생각에 명당을 찾겠다고  전국을 유랑하느라 아들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하나 남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남편을 졸라 서울로 이사했다. 처음 정착한 곳은 남대문 밖 염동. 하지만 양녕대군의 위패를 모신 지덕사 근처의 도동 골짝으로 옮겼다. 이곳은 남산의 서쪽으로, 기우제를 지내는 우수현의 남녘에 있는 도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이승만의 아호 우남은 우수현의 남녘의 줄임말이고.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따님답게 외아들 교육에 신경을 썼다. 직접 천자문을 가르치고 시 짓기도 지도했다. 서당 시절에 우남은 사서오경을 익히고 열세살이 되자 나이를 속이고 과거에 응시했다. 얼른  급제하여 성삼문 같은 조선의 충신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방. 그 후 해마다 응시했지만 연거푸 낙방. 열 다섯살이 되자 부모가 간택한 같은 동네의 음죽 박씨와 결혼, 아들 봉수를 얻는다.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을 계기로 서당 공부를 중지하고 신학문, 특히 영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 이듬해 아펜셀라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에게는 비밀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눈에 비친 배재학당은 천하에 몹쓸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청년 이승만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공자의 지혜를 터득한 유식한 학자인 나의 영혼을 1900년 전에 죽은 자가 무엇을 어찌 해보겠단 것인가. 아펜셀러의 설교를 들으며 노트에 이렇게 끄적거려 놓았다. <그의 설교를 귀담아 듣지도 않지만 들었다면 그것은 비판하고 반박하기 위해서일 뿐.> 

 

오해는 교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몹쓸 교리를 전하는 선교사들은 모두 미국 정부가 보낸 앞잡이들로 생각했다.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강요한 후 한반도를 미국에 병합하기 위해 보낸 에이전트. 바로 하와이에서 왕을 폐하고 그 섬을 합병했듯이. 그러나 재학당을 2년 다닌 후 이런 생각이 오해일 수도 있겠다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한 것은 영어를 배우려는 야심 때문이었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영어보다 더 귀중한 것을 얻었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 기독교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법에 의해 통치자의 독재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다면 우리도 그런 정치 이론을 채택할 수만 있다면 짓밟혀 사는 나의 동족에게 크나큰 축복이 될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심경 변화는 189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에게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서양의 정치제도와 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생들을 모아 협성회를 만들어 토론회를 열었다. 주제 중에는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도 있었다.

 

위에 실린 사진과 같이 우남은 어려서부터 갓 쓴 근엄한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고 성장했다. 유년기에는 서당 훈장으로부터 한문으로 가르침을 받았고 청년이 되어서는 아펜셀러에게서 영어로 신교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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