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서재필의 영향으로 민주공화정의 거목으로 성장 > 컬럼

본문 바로가기
미주지역 바로가기 : Calgary/EdmontonChicagoDallasDenverHouston,    TorontoVancouverHawaiiLANYSeattle

컬럼

문화·교육 스승 서재필의 영향으로 민주공화정의 거목으로 성장

페이지 정보

본문

<우남 2>


1895년 2월에 20세 청년이 된 우남이 배재학당에 들어간 목적은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입학한지 불과 6개월만에 배재학당의 초급 영어반의 조교가 된 것. 그러면서 고급 알바도 뛰었다. 한달에 20불을 받고 제중원의 여의사 G. Whiting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준 것.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활영어를 익힌 것은 20불짜리 알바에 붙는 덤. 


영어 때문에 배재학당에 들어갔만 그곳을 나올 때 그가 챙긴 것은 원대한 장미 빛 인생 설계도. 왕정을 허물고 민주공화정을 세우려는 서구지향적 민주혁명 사상이었다. 당시 배재학당에서 가르친 미국 선교사들의 학력이나 경력도 화려했지만 우남에게 이 사상을 직접 주입시킨 위대한 스승은 서재필 박사였다.  


서박사는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다.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의 여파로 박영효, 유길준 등 개혁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망명 10년만에 귀국, 충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며 배재학당에 출강, 그곳에서 이승만을 만나게 된다.


조선의 고질병 당파싸움의 병폐를 익히 아는  서재필.  학생들에게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닌, 정정당당하게 결론에 도달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다.  우선 학생들에게 활발한 토론을 충분히 하게 한 뒤 다수결에 의해 결정하는 민주주의 방식을 소개했다. 이에 이승만은 존경하는 스승 서박사의 지도 아래 협성회를 조직하여 토론을 공식화하면서 일반인도 참여시켰다. 이 모임이 활기를 띠자 토론의 내용과 결과를 알려 개화정신을 일깨울 매체의 필요성을 느껴 <협성회보>를 창간, 이승만은 주필로서 맹활약하게 된다.   


<협성회보>는 14호까지 주간으로 발행하다가 큰 호응을 얻게 되자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변경, 국내 최초의 일간지가 된다. 당시 조선 밖에서는 강대국들이 넘보고 안에서는 무능한 고종과 민비에 의해 통치되던 암울한 시기. 토론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비판으로 흐르게 되고 그 결과 분위기는 왕정이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기울게 되자 배재학당의 선교사들과 교사들은 협성회의 토론을 몹씨 불안해 했다. 


이들을 안심시키고 간섭도 피하면서 더 자유롭고 활발하게 토론하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아가 <독립협회>로 모이게 된다. 그런 후 서재필은 타블로이드판 <독립신문>을 한글판과 영문판을 창간, 격일로 발행하게 되고.


<세상에 불쌍한 인생이 조선 여펜네다. 여편네가 사내보다 조금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내들이 천대하는 까닭은 사내들ㅇㅇ이 개화되지 않은데 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짐승처럼 부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독립신문에 실린 이러한 논설문을 보면 이제는 칼이 아닌 글로, 개화로, 기독교식 평등사상으로, 민주공화정을 세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듯. 이러한 깨달음은 애제자 이승만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장차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성장한다.      


 1895년 10월, 일본 불랑배들에 의해 민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한다. 이에 분개한 백성들이 곳곳에서 의병으로 활동하게 되고 이승만도 이에 힘을 보탠다.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이뤄지지만 그 전에 첫 아관파천 계획인 <춘생문 사건>은 실패, 주모자는 처형되고 이승만은 몸을 피해야 할 처지가 된다.


이 때 도움을 준 의료 선교사가 있다. 바로 이승만에게서 한글을 배운 G Whiting 의료 선교사. 머리를 다친 듯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아 여자 환자로 변장시킨 다음 걸어서 황해도 평산에 사는 누나네 가서 숨기를 3개월.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이뤄지고 친러시아, 친미적인 내각이 들어서면서 이승만도 붕대를 풀고 배재학당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이듬해인 1897년 7월에 600여명의 내외 귀빈들 앞에서 영어로 연설까지 하면서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연설의 주제는 <Independence of Korea>.   


아관파천의 여파로 이제 조선은 러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이에 독립협회는1898년 3월 종로에서 1만명의 군중이 모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이 때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선출된다.  신분의 벽을 허무는 신호탄. 이들 앞에서 이승만을 비롯한 연사들이 정부를 거세게 비판하며 러시아 지도자들을 한반도에서 내쫓으라는 요지의 결의문을 작성, 정부에 보낸다. 


과도기의 혼란을 막을 힘도 없고 이 혼란에 대처할 통솔력도 없는 무능한 고종. 어제는 신진 개혁파의 요구를 액면 그대로 들어주는가 하면 오늘은 러시아를 등에 업은 수구파의 절대 불가 조항을 그대로 수용, 갈팡질팡하는 사이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한 민중 시위 집회는 갈수록 그 세력을 키우게 된다.  그 와중에 고종과 수구파의 미운털이 박힌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되자 이승만을 비롯한 소장파가 만민공동회의 개혁을 주도하게 되고. 


이제 이들은 만민뿐이 아닌, 관민공동회를 열어 박정양, 민영환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대신들과 정무를 협의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그동안 실권없이 이름뿐이던 중추원에게 실권을 부여하여 의회로 개혁하려는 요지의 <헌의 6조>를 고종에게 올렸고 이번에도 고종은 이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에 위기의식이 발동한 수구파. 이는 개혁파가 고종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우는  음모라고 고종에세 간한다. 이 모함에 넘어간 고종은 간부 17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해산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고종에 분노한 이승만은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에 가서 독립협회 간부들 석방을 위한 시위를 벌이자 고종은 체포 5일만에 이들 모두를 석방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Login

회원가입
이번호 신문보기 더보기

회사소개(KOR) | 광고&상담 문의
9219 Katy Fwy #291. Houston TX 77024
TEL. 713-827-0063 | E-MAIL. houstonkyocharo@gmail.com
Copyright © The Korea World News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or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팝업레이어 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