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 사건>으로 하와이 망명, 독립의 기틀 마련 >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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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105인 사건>으로 하와이 망명, 독립의 기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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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9> 


미국에서 최고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승만은 경성 기독청년회 (YMCA) 학감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낸 임병직, 과도 정부 수반을 역임한 허정 등 굵직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경성뿐 아니라 지방 곳곳을 돌며 YMCA의 몸통을 키웠다. 기차로 1,418마일, 배로 550마일, 걸어서 7마일, 가마나 인력거로 2마일…. 북쪽의 평양, 선천에서 남쪽의 광주, 군산에 이르기까지 무려 2,300 마일을 돌며 33회 집회를 열면서 7,535명의 젊은이들을 만난다. 이제 YMCA는 식민 치하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에 가슴을 뛰게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일본인들에게는 이러한 조직이 눈엣 가시로 비쳤지만 워낙 든든한 국제적 넷트워크로 연결된 YMCA이기에 함부로 어쩌지 못하던 차에 이리 활발하게 팽창하니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총독부 경찰은 평북 선천의 신성학교 학생 20명과 선생 7명에게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라는 엄청난 죄목을 씌워 경성으로 압송하고 연루자라는 명목으로 700명을 추가로 검거, 이들 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개신교계의 거두 윤치호가 주모자로 채포되자 이승만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직감했다. 금의 환향한지 겨우 1년여 만에 다시 찾아온 위기였다. 이럴 때마다  선교사들은 발벋고 나서서 이승만을 구해 준다. 이번에는 질레트 총무와 때맞춰 한국을 방문 중인 YMCA 국제위원회의 모토 총무가 도왔다. 그를 4년에 한 번 씩 열리는 감리교의 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 자격으로 미니에폴리스로 보낼 계획을 세운다.     


이승만은 동대문 밖에 있는 집을 저당 잡혀 여비를 마련했다. 부인 박씨에게는 집 뒤에 붙은 복숭아 밭을 사주고 이혼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하직을 고하며 감옥에서 지었던 싯구 한 구절을 떠올린다. <… 뵙지나 말았으면 근심이나 없지 / … / 날고픈 생각은 머나먼 기러기 / 높다란 자취는 가을 메아리 / 예부터 그지없는 지사의 한은 / 충효를 간직하긴 어려워서라> 1912년 그간 같이 일했던 간부들과 작별 사진을 찍고 이렇게 망명길에 오른 이승만은 1945년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고국 땅을 밟게 된다. 


4년에 한 번 씩 열리는 감리교 국제회의 목적은 우선 감독을 선출한 후 앞으로의 선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남은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장차 동아시아 중앙회의가 결성될 경우 한국은 일본과 한데 묶여 이 기구에 배치된다는 사실. 


이승만은 이런 위기에 처한 한국 감리교단을 구하기 위해 뉴저지로 가서 학창시절 친하게 지냈던 Jessie Wilson을 불러내 그의 아버지  Woodrow Wilson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 당시 윌슨은 뉴저지 주지사로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던 바쁜 시기였지만 애제자인 그와의 만남에 응했다. 여기서 우남은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일본의 박해를 알리고 그의 영향력을 빌어 수감 중인 105인을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돌아온 대답은 뻔했다. 개인사라면 물론 돕겠지만 이런 공적인 업무는 자신의 영역 밖이라는 대답. 


그래서 이듬해 그는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기 보다는 한국이 처한 딱한 사정을 알린 후  나라 잃은 한국인이 교회를 통해 외교의 길이 트일 것을 기대했다. 이어 그는 옥중동지이며 의형제로 맺은 동생  박용만을 만나기 위해 네브라스카 주의 해스팅스로 향한다. 이 때 박용만은 그동안 자신이 키운 소년병 학도 34명에게 제복을 입혀 기차역에 도열시켰다. 이런 환대를 받은 이승만은 밤을 밝히며 이야기를 나눈 후 큰 결단을 내린다. 귀국을 포기하고 대신 한인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하와이로 망명, 둘이 힘을 합해 독립 운동을 펼치기로. 


하와이는 1898년 미국에 병합되기 약 50년 전인 1850년부터 일본, 중국, 포르투갈, 필리핀 등지에서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대한제국은 그로부터 50년 후인 1902년 12월부터 이민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 노동자에 비해 약 100년은 뒤처졌다. 그마저도 1905년 일제의 방해로 2반 반만에 중단되어 1913년 이승만이 하와이에 망명했을 때는 약 6천명이 여러 섬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참고로 그 당시 재미교포 전체 수는 1만명을 넘지 못했으니까 반 이상이 하와이 군도로 몰려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독립운동의 베이스 캠프로 삼은 것. 


처음에는 사탕수수밭에서 일당 75센트를 받고 일하다 계약이 끝난 후 더러는 사탕수수밭을 떠나 자작농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아니면 도시로 진출, 채소 식료품 잡화를 취급하는 가계를 열기도 하고 자신의 장기를 살려 재봉소, 이발관 아니면 여관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3개월 먼저 와서 이승만에 대해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 낸 박용만 덕에 교포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호놀룰루에 도착한다. 그런 후 오아후 섬 푸우누이 구역에 교포들이 마련해 준 자그마한 집에 짐을 풀었다. 

 

1913년 5월에 도착한 이승만은 두달 동안 현지 사정에 밝은 안현경의 안내를 받으며 마우이 카우아이 등 큰 섬들을 답사하면서 현지 교포들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 후 필라델피아에 사는 서재필의 도움으로 9월에 순 한글로 된 <태평양 잡지>를 창간한다. 그 잡지는 1930년 <태평양 주보(Korean Pacific Weekly)>로 바뀔 때까지 17년간 발간되었다.  1914년 6월호에는 <하와이 군도>라는 글을 쓰면서  군도를 직접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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