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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상해 임정의 문제점을 숙제로 안고 워싱턴으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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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12)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 간의 대립이나 이에 따른 갈등은 어쩔 수 없이 생기기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이같은 정당 간의 견제가 한 사람의 독재를 막는 방법으로, 정치가가 민의를 전달받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자비한 한 사람의 독재는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을 기다리고 있던 문제 역시 서로의 심각한 대립과 극심한 갈등이다. 타협하기 힘든 무력투쟁론과 외교투쟁론을 선두로, 출신 지역에 따른 기호파와 서북파, 나이나 경력에 따른 노장파와 소장파, 품은 이념에 따른 갈등은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와 러시아 중심의 사회주의, 그리고 중국 중심의 민족주의로 나뉘어 도저히 타협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 갈등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상해 임시 정부의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 노동국 총판은 안창호, 경무국장은 김구였다. 옥중동지로 한 때 호형호제하던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소년병을 키우며 무력투쟁론을 주장하다 이승만과 결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외무총장 직함을 거절하고 북경으로 떠났고 거기서 반임시정부투쟁을 벌인다. 여기에 신채호가 힘을 보탠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함경도 출신으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여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 임시정부까지 시베리아로 옮기기를 원하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는 모든 행정 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넘기라면서 이승만을 압박했다. 여기에도 신채호가 힘을 보탰다. 

평안도 출신인 안창호는 상해의 서북파 지지와 미국의 국민회와 흥사단의 지지를 기반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이승만에게는 비협조적이었다. 애초에 이승만이 한성임정이 제시한 집정관총재를 수락하면서 이를 President로 영역한 것부터 빈정상해서 불만을 터뜨렸다.     


이들에 비해 김구는 감옥 선배인 이승만을 존경했다. 백범 일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 서대문 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 동안 ... 강연했다. 그 가운데 이 박사의 수택(손때)과 누흔(눈물 자국)이 얼룩진 책자를 볼 때 배알치 못한 이 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의 느낌이 있었다… > 이러한 좋은 감정이 있었기에 그는 임정의 경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일본의 밀정을 색출하여 처단함으로써 임정 요인들을 보호했다. 


결국 이승만 퇴진 운동을 벌이던 이동휘는 정무회의에서 그 대통령 밑에서 일 안한다고 선언하고 시베리아로 떠났고, 학무총장 김규식,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도 연달아 사퇴했다. 그런 후 안창호와 여운형은 군중대회를 열어 이승만을 비판했다. 3.1 운동 전후해서 이승만이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둘 것을 청원했던 사실을 밝히며 이는 독립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성토했다. 


이쯤되자 임정 세력은 이승만의 포용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여론은 점점 무력투쟁론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에 힘을 얻은 베이징의 무장투쟁파는 군사통일회를 소집하고 상해임시정부도 부인하며 새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내외 61개 단체가 참석한 국민대표회가 열린다. 여기에도 좌익과 우익, 좌익 중에서도 고려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으로 찢어지고 서로 갈등만 빚는다. 결국 안창호파는 탈퇴하고 급진파만 남아 조선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상해에는 아무 지지 기반이 없던 이승만이기에 이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미 국무장관 찰스 휴즈가 태평양 지역 9개국에게 해군 군비축소회담을 제의했다. 이승만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고 이 준비작업을 핑계로 다시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다시 오른다. 이번에는 친한 선교사가 마련해 준 밀선이다. 이 때 느낀 외롭고 초라한 감정을 시 한수로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따라 하늘따라 떠도는 이 몸 / 만리길 태평양을 몇 번이나 오갔는가 / 어느 곳의 명승도 다 보잘 것 없고 / 꿈속에도 내 나라 남산일세>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다.  지지 기반이 없어서 당한 상해에서의 뼈저린 고통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그는 하와이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다.  한편 상해임정에서는 은근히 기대했던 거금의 독립 자금도 없이 빈손으로 왔던 이승만이 극심한 갈등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아니 해결은 커녕 분열을 더 키운 채 빈손으로 떠나 버린 이승만을 불신임 투표에 붙였다. 의정원 17명 참석에 불신임을 반대하던 5명의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12:0 가결시켰으나 이승만은 이를 무시한채 소신껏 일했다.  


본토로 돌아온 우남은 이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 C.에서  본격적인 외교독립운동을 펼친다. 자신의 활동 본부를 <구미위원부 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이라 이름하여 해방 될 때까지 외교투쟁 본거지로 삼았고 이것이 정부수립 후에는 주미대사관이 된다. 


우남은 이곳에 미국인과 미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한국인을 채용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활약하던 김규식이 찾아와 힘을 보탰고 필라델피아에서 홍보 활동 중인 서재필과의  제휴도 잊지 않았다. 구미위원부의 첫 사업은 독립운동 기금 마련이다.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10부타 $500짜리까지 다섯 종류의 공채표를 만들어 연리 6%. 상환은 미국이 한국정부를 승인한 후 1년 뒤.로 하고, 미국은 물론 멕시코 쿠바 칠레 카나다 등지에 흩어져 사는 교포와 화교들에게 판매, 8만여 달러를 모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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