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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문화가산책] 모더니스트 회화의 두 거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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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문화가산책>

모더니스트 회화의 두 거장을 만나다

야수파의 마티스와 드랭 전시회 . MFAH에서 5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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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현기증, 야수파의 마티스와 드랭 전시회(Vertigo of Color: Matisse, Derain, and the Origins of Fauvism)’가 지난 2월 25일부터 휴스턴미술관(이하 MFAH)에서 관람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MFAH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공동 주최하고 있는 프링스 출신 두 거장 화가의 작품전은 5월 27일까지 넉넉하게 여유를 갖고 갤러리들을 초대한다. 


파리 미술관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첫 나들이를 한 'Vertigo of Color'는 MFAH으로 자리를 옮겨 앞으로 9주동안 마티스와 드랭의 그림, 드로잉, 수채화 65점을 휴스턴 관람객들에게 선 보인다. 


개리(Gary Tinterow) 휴스턴 미술관 관장은 전시 첫날 리셉션 회견에서 “Matisse와 Derain이 1905년 여름 함께 실험하며 만든 작품은 전통적인 색을 기초로 본래의 표현기법에서 해방되는 역할을 했다"며 "이 혁신으로 인해 그들과 그 뒤를 이은 예술가들은 보다 현란한 색을 표현하여 모더니스트 회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정리=임용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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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색채의 현기증, 야수파의 마티스와 드랭 전시회’를 관람하고 기념품점에 들른 갤러리들이 두 거장의 관련서적과 모사작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뛰어난 데생 능력의 색채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초반 신인상주의를 거쳐 1905년부터 포비즘의 경향을 보인 앙리 마티스는 공간표현과 장식적 요소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1932년 이후 평면화와 단순화를 시도하며 '로제르 드 방스 성당'의 건축 설계와 벽화를 제작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 북부 르 샤토 캉브레시에서 출생해 니스 교외의 시미에에서 사망한 그는 처음 법률을 수학하여 재판행정담당 서기가 된다. 1889~1890년 처음으로 데생, 회화에 흥미를 가졌으며, 1892년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가 1895년 에콜 드 보자르의 귀스타브 모로의 교실에서 루오와 서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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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살롱에 첫 출품. 1898년에 스승 모로가 사망하자 다음 해에 아카데미를 떠나 파리의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렝과 알게되고, 그의 소개로 블라맹크와도 교제한다. 그 전후로 신인상주의에 접근, 1904년 볼라르의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연다. 1905년의 여름을 드렝과 프랑스 남부 지중해 부근에서 보내고 함께 포비즘에 도달하게 된다(『콜리우르의 열린 창문』 1905, 뉴욕, 존 헤이 휘트니 소장 등). 


다음 해 거트루드 스타인 집에서 피카소와 만난다. 그해에 알제리, 다음 해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1908년 『Note d’un Peintre』 (화가의 노트)를 발표한다. 그해, 모스크바의 대수집가 시추킨에게 『후식: 붉은 색의 하모니』(에르미타주 미술관)등을 매도. 1911년에는 그의 초대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그 때부터 여러가지 공간표현의 실험, 장식적 요소의 대담한 사용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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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부터 겨울은 니스에서, 여름은 파리에서 보내는 일이 많아지고, 『오달리스크』의 주제를 즐겨 택한다. 1932년 미국 메리온 소재 '반즈재단'의 벽화 『댄스II』를 완성함(반즈 재단미술관). 이후 평면화와 단순화의 시도(『장미빛의 나부』 1935, 볼티모어 미술관 등)를 거쳐, 1940년대의 대실내의 연작을 하기에 이른다(『빨간 대실내』 1948, 파리 국립현대미술관람 등).


1941년 대수술을 받고, 1943~1948년 남프랑스의 니스에 정주, 절지화(切紙畵)에 전념하여, 작품집 『재즈』를 출판(1947). 1948~1951년, 건축의 설계, 벽화, 스테인드 글라스 등 모두 자신의 구상에 의한 로제르 드 방스 성당을 완성했다. 일찍이 조각과 판화에도 손댔으며, 말라르메 시집의 삽화(1931)와 그래픽 작품에도 열정을 쏟는다. 


야수파 운동의 선구적 인물 앙드레 드랭(Andrè Derain)


앙드레 드랭은 1880년 6월 10일 프랑스 파리 외곽의 샤투라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는 주로 루브르박물관에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고향 근처의 풍경을 그리면서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다가 아카데미 쥘리앙에 입학했다.


드랭은 1900년 파리에서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와 만나 스튜디오를 함께 쓰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풍경화를 그렸다. 그 후 병역을 마치고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작품에 끌리게 되면서 이 세 사람은 가까워졌다. 1905년 여름, 드랭은 스페인 국경 부근에 있는 지중해의 작은 어촌 마을 콜리우르에서 마티스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여기에서 두 화가는 색채에 기반을 둔 새로운 시각 언어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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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가을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에 마티스, 모리스 드 블라맹크,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들의 작품을 본 많은 비평가들은 작품의 대담함과 거친 성격에 충격을 받고, 이를 ‘야수들’의 그림과 같다고 해서 ‘야수파’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의 야수파 회화는 폴 세잔(Paul Cézanne)과 폴 고갱(Paul Gauguin)의 작품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작은 색점들로 빛의 효과를 묘사한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폴 시냑(Paul Signac)과 같은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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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무렵 드랭은 입체파 화가인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처럼 파리의 민속박물관에서 접한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조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조각 작품 《웅크리고 앉은 남자》(1907)는 야수파와 입체파를 조합한 독창적인 기법으로, 근대 조각의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드랭은 발레단 발레뤼스와 파리 오페라의 무대 디자인에 온 열정을 쏟아 부었다. 또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살로메》등 상당수의 일러스트레이션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회화에 있어서는 어둡고 무거운 색채에 뚜렷한 명암과 오묘한 세부묘사로 뛰어난 내면성과 청신한 현대감각을 담았다. 드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 하에 있을 때 독일인의 초청에 응했다는 이유로 나치의 조력자라는 오명을 달고 말년을 자기 회의에 빠진 은둔자로 살다가 1954년 파리 교외의 가르슈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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