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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5년반만에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 학위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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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7>


대한제국의 개화기에 미국 유학을 떠난 한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김규식 등을 비롯하여 대략 70명 안팎이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승만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05년초 부터 1910년까지 약 5년 6개월 동안 우남은 세 학교를 옮겨 다니며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 당시에는 미국인들도 대학 진학율이 5% 정도에 그쳤다고. 프린스턴 총장으로 이승만에게 박사 학위를 준 후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The future redeemer of Korean Independence 라고 소개했을 만큼 한 동양인이 이룬 이 업적은 대단했다.


1905년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근처 커버넌트 장로교회의 햄린 목사를 찾아가 대한제국을 떠날 때 품속에 품고 온 19장의 추천서 중 한 장을 내밀었다. 워싱턴 사교계에 폭넓은 인맥을 가진 헴린 박사는 우남에게 세례를 베푼 후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을 소개해 주었다.  


총장은 이승만이 배재학당 2년 다닌 것을 감안, 학부 3학년에 편입시켜 주었고.  조지 워싱턴 대학은 백악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미국의 정치판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우면서 2년 6개월만인 1907년에 학사 학위를 받는다.


그런데 그의 첫 해 성적은 불량했다. 배재학당 시절에는 영어 잘 하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막상 미국에 와보니 첫 학기는 D 학점을 받고 2학기에 가서야 B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대체로 역사 철학 등 인문 계열의 성적은 좋았지만 수학 경제학 등 이과 쪽으로는 후진 점수로 일관했다. 


우남의 학교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이유는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잦은 강연 때문에 학업에 전념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들 봉수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컷을 것이다. 부인 박씨는 남편이 유학길에 오르자 자기도 곧 합류할 생각으로 우선 아들부터 남편의 옥중동지인 박용만 편에 보낸다. 미국 대학 생활 두 달만에 일어난 일이다. 


당황한 이승만은 평소 친분이 있는 워싱턴 타임즈 기자에게 부탁해 사진과 함께 광고성 기사를 낸다. 제목은 <HOME IS WANTED FOR KOREAN BOY> 이 기사를 본 필라델피아에 사는 유복한 부인이 나서서 아이를 데려갔다. 그런데 봉수(본명은 리태산)는 시립아동보호소에 맡겨졌다가 거기서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는다. 


이승만은 전보를 받고 달려갔지만 디프테리아가 전염병이기 때문에 아들의 시신을 보지도 못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은 그 날 일기에 적은 “슬프다” 딱 한마디에 농축시켜 묻었다. 그러나 7대 장손을 잃은 할아버지 이경선공의 슬픔은 며느리에 대한 분노로 폭발했다. 이 분노는 훗날 우남의 귀국 후 이혼으로 이어진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충정공 민영환을 잃고, 이어서 외아들까지, 끝내는 나라까지 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학업과 독립운동에 몰두하는 일이었으리라. 


조시 워싱턴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두고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 인문대학원장에게 맹랑한 편지를 써 보낸다. <다년간 동양학을 공부한 나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에서 2년 내에 박사학위를 얻기를 희망한다. 고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고 가서 할 일도 많기 때문이다>는 내용.  기가 찰 노릇이다. 본국 학생도 박사가 되려면 적어도 4년은 걸리는데 동양 학생이 2년이라니. 그런데 그런 시한부 조건은 붙이지 말고 한번 와서 석사부터 밟으라는 입학 허가 답신을 받는다. 


보스턴. 기독교 사상에 입각해 자유를 찾아 떠나 온 필그림들이 첫 발을 디딘 아메리칸 독립의 요람지. 그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대한 독립도 이룰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열심히 공부하고 연설 알바도 바쁘게 뛰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자신이 기대했던 학교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의외로 하버드는 세속적인 지식 탐구에만 몰두되어 선교열에 불타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낯설어한다.       


그런데 그 때 예기치 못한 뉴스를 접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이 한인에 의해 저격 당했다는 소식. 교포들은 장인환, 전명운 두 애국 열사의 구명운동에 나섰고 이승만에게 법정 통역을 의뢰했다. 평소에 무장투쟁은 기독교 사상에 어긋날 뿐아니라 독립을 위한 수단도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고민 끝에 거절한다. 평소에 그는 교육을 통해 실력을 쌓는 것이 우선이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면 그때 미국과 함께 총력전을 벌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 이승만은 자신의 기독교적 신념에 맞는 대학으로 전학하기 위해 뉴욕에 왔다가 우연히 한국에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홀 선교사를 만난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대학 출신이다. 그래서 그 둘은 프린스턴에 찾아가 2년 박사수료 보장뿐 아니라 무료 기숙사 혜택까지 받는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을 우연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라 한다. 당연히 나도 그렇게,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것으로 믿는다. 


1908년 9월학기부터 아름다운 뉴저지 프린스턴 캠퍼스에서 윌슨 총장, 웨스트 대학원장, 그리고 어드만 신학교 학장의 총애를 받으며 공부한 끝에 1910년 6월 14일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때 논문 제목은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이 1776-1872년 까지  100년간 유럽 해양강국의 반격을 제압, 무역의 중립성을 성장시킨 내용으로 이 논문은 졸업 2년 뒤인 1912년에 프린스턴대 출판부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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