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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헌법의 초석인 대헌장의 디딤돌이 된 존왕의 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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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11>


리처드 1세가 제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용맹스런 지휘관으로 이름을 떨치며 싸우고 있을 때 잉글랜드에서는 동생 존이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결탁, 형을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 그래서 리처드 1세는 전쟁을 화친으로 마무리하고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오다 신성로마제국에 잡혀서 몸 값을 치르고서야 귀국, 왕권을 회복한다.

거액의 몸 값을 치러 준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간곡한 부탁에 ‘어린애가 간신들의 농간에 놀아나 저지른 짓’으로 치부하고 존을 용서해 준다. 그 때 존의 나이는 27세인데 어린애라… 존의 아둔함과 형의 너그러움이 담긴 표현이다. 곧이어 리처드는 프랑스 원정에 나섯다가 그곳에서 전사한다.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용상을 지킨 햇수는 고작해야 1년이 될까. 암튼 그는 타고난 무사였지 현군은 아니었다. 그가 후사도 없이 죽는 바람에,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있다, 1199년,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존(1167-1216)왕이 옥좌를 차지한다.
하지만 프랑스에 영지를 가진 잉글랜드계 귀족들은 그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넷 째 형인 제프리의 아들이자 브루타뉴 공작인 15세의 아서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리고 존을 추대한 귀족들의 행위를 반란으로 보고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결탁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아서는 할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생포하려하자 존이 즉시 출동, 어머니를 구하고 조카인 아서를 생포한다. 그런 후 아서는 사라진다. 그 당시에는 존이 조카의 목을 졸라 죽이고 돌을 달아 세느 강에 던져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로빈훗, 아이반호, 세익스피어의 <존왕>에서는 이 장면을 각기 다르게 묘사하기 때문에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존과 아서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일듯.


뿐만 아니라 존은 아서를 없앤 후 이 때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썩은 물이 흥건히 고인 코프 성의 지하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인다. 봉건제에서는 왕-공작-백작의 서열에서 백작의 주군은 공작이다. 따라서 포로로 잡힌 공작의 신하들은 주군인 공작과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 왕에게 직접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만약 왕이 이런 백작들을 처형하면 폭군이 된다. 귀족다운 대우를 해 주다 몸값을 받으면 풀어줘야 한다. 중세의 기사도가 이래서 멋진 것. 그런데 존왕은 아서 공작의 부하들을 직접 처형하지 못하니까 굶겨 죽이는 야비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대륙령을 소유한 귀족들은 존 왕을 버리고 필리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존왕은 프랑스에 있는 많은 영토를 잃게 된다.

내친김에 필리프는 노르망디도 공략했다. 이를 막기 위해 존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로 간다. 그리고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양면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이 모든 통신 수단을 갖춘 지금이라면 제대로 먹히겠지만 무전기조차 없던 13세기 초에는 무모한 짓일뿐. 밀물과 썰물 시간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해 프랑스군의 보급로도 차단시키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러한 양면 작전은 이론상으로는 훌륭한 전략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존왕은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린다.
이것이 억울한 존왕은 프랑스 영지를 되찾기 위해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 이를 위해 귀족들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거둔다. 선왕 때부터 전비 충당에 허덕였는데 또 증세라니. 여기저기서 귀족들의 불만이 터지고 원성이 높아만 갔다. 엄밀히 따져 볼 때 이 프랑스에서 잃어버린 땅은 왕실이 소유한 사유 재산이다. 그런데도 충성 서약 때문에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왕이라면 또 모를까…

어쨌든 존왕은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4세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형성, 프랑스를 침공한다. 그러나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의 왕자 루이에게 참패, 천명의 전사자와 9천명의 포로를 뒤로한 채 빈손으로 돌아온다. 아니, 그렇게 심한 반대를 무릎쓰고 갔으면 이겨서 돌아와도 마뜩잖을 판에 그 막대한 전비를 허비하고 패전의 굴욕이라니. 귀족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Magna Carte 대헌장이다.
귀족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인 스티븐 랭턴의 도움으로 헨리 1세가 제정한 즉위헌장 (Coronation Charter)을 기초로 왕의 권력을 대폭 줄이고 자유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왕에 대한 귀족들의 의무를 조정하는 강령을 작성했다.

중요한 내용으로는 39조, 자유민은 직위가 동등한 사람들의 적법한 판정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체포, 구금, 추방할 수 없다. 왕은 직접 혹은 사람을 보내어 강제로 법을 집행하지 아니한다. 12조, 군역 면제세, 특별세를 징수하려면 나라 전체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단, 인질로 잡힌 왕의 몸값을 지불할 때나 왕의 첫 아들 기사 작위 수여식, 첫 딸의 결혼식은 예외로 합리적인 특별세를 징수한다. …


1215년 6월 어느 날 탬즈강 초원에 나온 존왕은 귀족들의 강압에 못 이겨 이 대헌장에 서명한다. 이 대헌장은 4세기를 넘긴 먼 훗날 권리청원(1628), 권리장전(1689)으로 이어졌고 그보다 한세기를 더 넘긴 후엔 식민지로 유입되어 미국의 독립 선언문(1776), 수정헌법(1789)의 뿌리가 되었다. 거기서 두어세기를 더 넘긴 후엔 세계인권선언(1948), 유럽인권협약(1950), 그리고 카나다, 호주 등 영연방국가들,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의 헌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옛날 한 섬나라의 한 왕이 저지른 무리한 실책이 먼 훗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막강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의 기초가 되는 아이러니. 이런 것을 로마서 8장 28절에 언급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잘도 갖다 부친다고 뭐라 하려나. 암튼 나는 이러한 역사의 매력에 쉽게 끌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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