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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찰스 2세의 등극과 더불어 터진 전염병 화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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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36>

1660년 반크롬웰파의 쿠데타 성공으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 (1630-1685). 왕관을 쓰자마자 그가 한 첫 사업은 아버지 찰스 1세에 대한 철저한 복수였다. 우선 올리버 크롬웰의 시체를 꺼내 부관참시하고 아버지의 사형을 주도한 26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그 외의 관련자 50여명은 파직시키고 유배보내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으로 과거사를 정리, 더 이상의 피의 복수는 하지 않았다.

복고 왕정이지만 아버지처럼 의회와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타협하며 난국을 헤쳐나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어려운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즉위한지 5년만에 흑사병, 런던 대화재에 이어 네덜란드와의 전쟁까지 치러야 할 상황에 이른 것. 1년 사이에 세가지 악재가 겹쳐 그를 괴롭힌 셈.

그 당시 런던은 인구50만이 득실거리는 영국에서 가장 큰 도시로 런던 성곽(London Wall) 속에 살고 있었다. 이 성안에는 동물의 배설물, 쓰레기 등이 넘쳐 나 악취를 풍기고 여름에는 진훍투성이에 파리 떼가 들끓는 위생 제로 지대. 여기에 인근 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검은 연기까지 보탠다. 1665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무더위가 비위생적인 곳을 덮치면 전염병이 안 생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흑사병은 삽시간에 런던 성을 강타했다.

짐승에서 생긴 벼룩이 페스트 균을 옮긴다는 소문을 들은 시민들은 눈에 띄는 고양이와 개는 모조리 잡아 몰살 시켰다. 그런데 숙적인 고양이가 사라지자 이번엔 진짜 전염 매개체인 쥐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 떼지어 다니며 병균을 더욱 확산 시킨 것. 이때 찰스2세는 원래 헨리 8세의 사냥터였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던 하이드 파크를 개방, 전염병 피난처로 사용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하이드 파크는 오늘날까지 런던 시민의 휴식처가 된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병마를 걷잡은 것은 이듬해 가을에 번진 화마였다. 그 당시 런던에 있던 일반 주택은 제팅(Jettying) 형식의 목조 건물이나 잔가지와 진흙을 짓이겨 흙벽을 만든 와틀 앤 더브(wattle and daub)로 둘 다 화재에 취약한 자재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제팅 형식은 좁은 땅에서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윗층을 아랫층보다 더 넓게 만든 다세대 주택이다. 귀족들은 외곽으로 나가 그림 같은 전원 주택에 살지만 일반 서민들은 이런 곳에서 바글바글.

찰스 2세는 이러한 화제에 취약한 주택을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낡은 것은 철거하겠다는 경고문도 써 붙였으나 소 귀에 경 읽기. 거기서는 판자촌 강제 철거가 통하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악조건이 더 보태진다. 지난 10개월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이 목재 건물들은 바짝 마른 상태였고 템스강변에는 화약 가루가 널렸었다 한다. 이는 군인들이 민가에 화약을 쟁여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올리버 크롬웰이 신식 군대를 편성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1666년 9월 2일, 한 빵가게의 화덕에서 번지기 시작한 불은 강풍을 타고 화마로 변했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불 붙기 전에 그쪽 건물들을 미리 없애 버리는 것이 그 당시의 소화 방식인데 당시 굼뜬 런던 시장은 제 때 명령을 내리지 못하자 찰스 2세가 직접 나서서 ‘집을 아까워하지 말고 당장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사실 그 이전에도 화재는 빈번히 발생했고 그 때마다 민병대가 나서서 잘 처리해 주었으니 이번에도… 하고 성안의 시민들은 방심했던 모양이다.

2세기말과 3세기초에 걸쳐서 로마군에 의해 둘러쳐진 성벽은 높이가 무려 5.5미터. 소방관은 길이 좁아 원활한 작업을 할 수도 없었고. 뒤늦게 위험을 감지한 시민들이 8개의 출구로 밀려 오는 통에 소방 작업은 더욱 지연되어 불이 난지 나흘만에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잃은 것은 많았지만 얻은 것도 있다. 그 지긋지긋한 흑사병이 씻은 듯이 싹 사라진 것.

국가 간의 무역이 경제라는 선을 넘어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면 이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 당시는 유럽 상선들이 세계 곳곳에 항로를 개척하던 대항해 시대.

이 때 크롬웰은 항해조례를 만든다. <영국의 식민지로 상품을 옮길 수 있는 상선은 선원의 반 이상이 영국인으로 채워 진 영국산 상선이어야 하고, 식민지로 가기 전에 반드시 잉글랜드를 거쳐 수입 관세를 지불해야 한다> 는 것. 이 조례를 보고 발끈한 나라는 당시 해양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

그래서 네덜란드와는 도버 해협에서 이미 한차례 전쟁을 치른 상태. 그리고 10년이 지난 1665년과 1672년에 2차, 3차 전쟁을 벌인다. 전염병과 화재로 한참 어려울 때, 상대국의 이러한 국가적 재난을 틈타 벌인 전쟁이기에 당연히 영국이 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횡재한 것. 승전국인 네덜란드는 쓰잘데 없어 보이는 조그만 항구도시인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인도네시아의 룬(Run)섬과 맞바꿨으니… 저런.

찰스 2세는 1662년에 포르투갈의 공주 캐서린(Catherine Henrietta)과 결혼한다. 이 때 왕비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봄베이 지배권을 발판으로 찰스 2세는 인도에서의 입지를 더욱 굳힌다. 그러나 병약한 캐서린 왕비는 임신하는 족족 매번 유산했기 때문에 영국에 자손을 퍼뜨리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널리 퍼뜨린 것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영국의 차 문화. 그 당시 홍차는 매우 값진 물품이었지만 부유한 친정에서는 늘 마셨기 때문에 인이 배긴 것. 그 비싼 홍차를 들여와 오후되면 티 타임을 갖는 왕비를 보고 가만히 있을 귀족 부인들이 아니지. 저마다 명품 홍차를 들여와 홀짝이던 것이 오늘날의 영국 차문화로 발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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