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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이승만의 독립 쟁취 수단은 남들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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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10)


우리는 ‘독립 투쟁’하면 으례껏 군대를 키워 무력으로 쟁취하는 것을 연상하는 성향이 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의 단어가 그냥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고 인류사 속에 자연스럽게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뭔가를 얻거나 헌 것을 새 것으로 바꾸거나 갈아엎으려면 항상 이 단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남과 호형호제하던 박용만도 이 방법을 고수했기 때문에 종래는 갈라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달랐다. 이미 잘 살게 된 나라, 미국의 힘을 지랫대로 깔고 거기서 끌어 올려지는 힘으로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 힘은 고차원적이고 정상적인 외교를 통하여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일류 대학에서 최고 학위를 빨리 받아야 했고 미합중국의 버팀목이 된 기독교 사상을 우남 자신도 죽는 순간까지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남은 나라 잃은 현실을 비극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개선하고 개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가는 곳마다 연설을 통해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는 1908년 3월, 미국과 카나다 청년선교 운동(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of US & Canada) 주최로 핏츠버그에서 열린 제 1차 세계선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연설한 그의 연설문에 잘 드러나 있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그는 어딜 가든지 자신을 한국 대표로 소개한다. 국적이 없어 해외 여행 할 때마다 애를 먹지만 끝까지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거나 삶을 영위할 나라가 없게 되었고 평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 한국이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기회입니다. 자기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져 어둠 속에서 자기들을 들어 올려줄 어떠한 위대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들을 들어 올려줄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썩어빠진 정부는 정화되어야 하고 그들의 마음과 힘은 갱생되어야  하는데 공자나 부처님은 그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일 한국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참다운 구원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큰 기회를 주셔서 한국 사람들이 민족적 오만과 조상 숭배와 미신을 버리고 빈 마음과 겸손한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아름답고 자그마한 나라가 1920년대에는 완전한 기독교적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에 처한 나라에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시고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보살펴 주십시오…>


미국의 힘을 한국 독립의 지랫대로 이용하자면 우선 국민들이 무지에서 깨어나야 된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언론, 교육, 선교에 힘썼다. 그런데 그가 

 1913년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이미 미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65명의 한인 남학생에게 기초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인기숙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학교를 맡아 운영하던 John Wadman감리사는 이승만이 도착하자 그에게 학교 운영권을 넘겨주었다.


이 학교를 인수받은 이승만 교장은 우선 학교 이름부터 한인 중앙 학원(The Korean Central Institute)으로 고치고 학과도 고등과. 소학과, 국어과, 한문과로 개편하고 성경도 가르쳤다. 이 소문이 퍼지자 섬 곳곳에서 남학생뿐만이 아니라 여학생들도 몰려왔다. 그래서 이듬해 호놀루루에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했다. 순전히 한인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이곳에는 24명의 여학생들을 수요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의 육영사업이 나래를 펼칠 무렵 감리교단의 감리사가 바뀌면서 교단의 제제를 받기 시작했다. John Wadman은 이승만을 잘 알고 그를 적극 후원해 준 감리사였다. 1904년 이승만이 하와이에 처음 방문했을 때 그를 교민들에게 소개해 준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호놀룰루에 잠시 들른 Theft 육군장관을 부추겨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마련해 준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그의 후임으로 온 William Fry는 이승만을 모른다. 


그는 한국사와 한국어 가르치는 것은 하와이 특유의 인종혼합정책에 위배된다하여 제제를 가한 것.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재정업무까지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교육에만 주력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발끈한 이승만. 그의 장기인 자력강생의 길을 모색한다. 


우선 하와이 섬들 구석구석까지 돌면서 동포들에게 한인 학교는 물론, 한인 교회까지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모은 7천7백 달러와 대한인국민회의 보조금으로 3에이커의 대지를 마련, 한인 여자 성경 학원(The Korean Girls’ Seminary)를 짓고 73명의 여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본격적인 학교를 세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18에는 이 학교명을 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로 바꾸고 남녀공학으로 변경, 본격적인 민족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면서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도 완전히 인연을 끊는다. 


이렇게 자립해서 몸통을 불려가던 육영사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교포 2세들의 한국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겨우 명맥만 이어졌다. 1952년에  교민들은 우남의 뜻에 따라 기독학원을 판 돈15만 달러를 인천 용현벌로 보낸다. 그래서 그곳에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를 딴 인하공과대학이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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