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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이승만은 옥고를 치르면서 기독교로 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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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3>


우남이 정치 활동을 시작했던 구한말 그 당시 상황은 그가 지은 한글 시 <고목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의 형식은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찬한 <찬양가>에 나오는 음률을 모방한 것으로 1898년 3월 9일자 협성회보에 실렸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배운   최초의 한글로 쓰인 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이 시는 1908년 <해조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우남의 <고목가>는 그보다 10년 전에 이미 한글로 쓰였으니 …. 하여간 이 시는 이렇다.


 1절>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 몇 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 / 2절> 원수의 땃짝새(딱따구리) 밑을 쪼네 /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하려고 / 3절>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  뿌리만 굳 박혀 반근盤根되면 /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 강근强根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 / 4절> 쏘아라, 저 포수 땃짝 새를 / 원수의 저 미물, 나무를 쪼아 /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 넘어지게 하니 어이할꼬/


여기서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선 고목은 그 당시의 대한 제국의 모습을, 땃짝 새는 러시아를 등에 업고 설치는 관리들을, 이 새를  쏘는 포수는 자신과 같은 독립투사를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암울한 대한제국을 바로잡고자 우남은 고종황제의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1899년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동안 한성감옥에 갇힌다.

우남이 영어의 몸이 될 그 당시 우리나라는 더 이상 사대주의에 쩐 조선이 아니었다. 중국과 같은 자주 독립국가임을 선포한 대한제국이었다. 


1897년 아관파천이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으로 불리기까지 이름이 여러번 바뀌면서 조선과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돌담길로 더 친근하게 기억되는 궁궐이지만.


원래는 세조가 남편잃은 맏며느리에게 마련해준 사저로 월산대군의 저택이된다. 1593년 임진왜란 때 피난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 난리 통에 불에 탄 경복궁과 창덕궁이 수리될 때까지 임시로 머문 처소, 행궁이 되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재건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이곳을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 준다. 인목대비가 이 경운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으로 불리게 된다. 1623년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고, 그로부터 200여 년 후인 1897년 러시아 공관에서 나온 고종이 경운궁에 살다가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한 후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다.   


이곳 정동에는 많은 외국 공관이 몰려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경운궁에 머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그 해 10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제 황제가 된 고종은  비운에 죽은 민비를 명성황후로, 두 아들 강과 은은 각기 의친왕과 영친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제국의 위엄을 갖추었다. 이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13년을 지탱한다.  


이승만이 투옥된 때는 1898년 11월 19일 그가 당시 종 9품인 충추원 의관에 임명된 후였다. 그는 당시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일본에 망명중인 급진적 개혁 정치가 박영효를 중심으로 새로운 혁신 내각을 세우려는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쉽게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는 종로에서 열리는 군중대회에 참석할 요량으로 탈옥을 시도하다 잡히는 바람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중죄인이 된 것.   


그래서 한성감옥에 갇힌 청년 이승만은 우선 주위를 둘러보면서  <쇠사슬에 얽매인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정이 두터워지고 / 사립 쓴 사람을 만나서 생소치 않고 구면 같구나>라면서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 당시 한성감옥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신진 개혁파들의 아지트였다. 왼쪽에 중죄수복을 입고 있는 이승만을 비롯하여 앞줄 왼쪽부터는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이고 뒷줄 왼쪽부터는 안명선, 김린, 유동근, 이상재의 아들 이승인, 그리고 아버지 대신 복역하던 어느 소년이다.


중죄인으로 사형언도까지 받은 그는 해를 넘기며 <옥중의 세모>라는 시를 지어 혁명투사이기 이전에 자신은 부모를 모신 아들이고 한 가정의 지아비로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저울질 해 본다. <밤마다 길고 긴 사연 닭이 울도록 / 이 해도 거의로다 집이 그리워 / 사람은 벌레처럼 구먹에 살고 / 세월은 시냇물처럼 따라가누나 / 어버이께 설술을 올려보곺아 / 솜옷 부쳐 준 아내 보곺아 / 헤어보니 이 겨울도 열흘뿐인데 / 삼 년을 매어 둔 말 한가롭구나>


발목에는 족쇄를, 손목에는 수갑을, 목에는 10kg이나 되는 무거운 형틀을 쓰고 언제 불러나가 죽게 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형수가 된 우남.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해지자 문득 배재학당 시절,  그렇게 가기 싫었던 채플 시간에 그렇게 듣기 싫었던 설교,  ‘네가 너희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한 구절이 절망으로 가득찬 뇌리를 스친다. 이 때 자기도 모르게 나온 외마디 기도는 ‘오, 하나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 주옵소서!’  짧지만 온 마음이 담긴 외침이었기에 그는 그를 향해 다가온 희망의 빛줄기를 체험하고 일생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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