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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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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Bloody Mary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때의 잉글랜드는 가난에 찌든 3류 섬나라에 불과했다. 게다가 정세도 불안했다. 대외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스페인의 펠리페2세가 앙심을 품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귀족들, 특히 프랑스에서 남편을 잃고 친정 스콧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스튜엇 여왕의 칼끝도 언제나 엘리자베스1세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우외환이 겹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사정은 달랐다. 대항해 식민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금은보화와 아시아로부터 여러 종류의 값비싼 향신료를 열심히 실어 나르던 포르투갈, 스페인은 어느새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이에 명석한 두뇌를 굴려 이 사태를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엘리자베스 1세. 당시 최고의 해적 두목 프란시스 드레이크를 기용하기로 했다. 해적이라 쓰고 무역으로 읽는 증서를 쥐어 주면서 적극 지원했고 자신은 사재를 털어 그 행위에 투자까지 했다. 이제 해적질은 영국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며 그 ‘무역’은 번창했다.

이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펠리페2세는 아니지. 해적 두목 드레이크를 당장 처벌하라고 통보했는데 처벌은 커녕 작위까지 수여하며 귀족으로 승격시킨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네델란드에서 일어난 개신교도들의 독립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개인적으로는 청혼도 거절 당하고 하여 언젠가 손 볼 참이었는데 마침내 잉글랜드를 칠 결심을 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당대 최고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가진 스페인을 상대로 것은 휘발유를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 하지만 드레이크는 평소에 하던 대로 스페인의 주요 보급로인 카디스항을 공격, 약탈했다. 이에 아직 전쟁 준비가 끝나지 않던 펠리페 2세는 1588년 5월, 성급하게 아르마다를 출동시킨다.
거대한 위용을 갖춘 스페인의 무적함대이지만 거기에도 단점은 있었다. 덩치가 크기 때문에 속도가, 특히 회전할 때 엄청 느린 것. 승선한 군인들이 해병이 아닌 육군 보병이란 점. 그래서 해전에서는 상대방의 배를 들이받고 옮겨탄 후 육박전을 벌여야 이길 수 있는 상황.

이를 감지한 잉글랜드군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치고 빠지는 작전을 선택했다. 겉보기엔 허접한 작은 배이지만 작기 때문에 민첩하게 도망칠 수 있었고 승선한 군인들도 사실 전쟁 중이니까 해군이지 평소에는 바다 위를 휘젓고 다니는 해적떼들. 거기다 날씨까지 도와줘서 멀리서 화공포를 쏘아 날려도 바람을 타고 아르마다를 적중시킨 것.
해전에 이겼다 해도 실제로 주판을 튕겨보면 가난한 잉글랜드의 손실은 스페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컷지만 그런 손익계산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이 승리로 인해 잉글랜드는 3류의 허름한 옷을 벗어 버리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진 것. 이는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차린 것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이 회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17세기에 들어 서면서부터는 북아프리카에 제임스타운을 세우는 등 해양 강국으로 발돋음하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자베스1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대를 이을 후사를 걱정하는 대신들에게 ‘짐은 잉글랜드와 결혼하였노라’라는 한마디로 입틀막. 사실 아버지는 아들을 얻겠다는 핑계로 6번이나 황후를 갈아 치웠고 생모는 자신의 오빠를 포함해서 5명의 남자와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는 것을 보고 자란 엘리자베스. 결혼 같은 것이 하고싶었겠는가.

하지만 ‘결혼은 선택, 연애는 필수’라는 어느 경망한 유행가의 가사처럼 연애는 곧 잘 했고 사방에서 들어오는 청혼에 애매하게 대응, 외교적으로 이용하기도. 소꿉친구인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는 여왕이 되어서도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 날 멀쩡하던 더들리 부인이 갑자기 계단, 그것도 몇 단 되지도 않는 낮은 곳에서 떨어져 죽자 세간에서 쏘아대는 의심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은 적도 있었다.
어린 엘리자베스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잘 보살펴 준 계모는 헨리 8세의 6번 째 부인인 캐서린 파(Catherine Parr)였다. 헨리 8세가 죽자 캐서린은 옛 애인인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한다. 토머스는 헨리8세의 세 번 째 부인 제인 시모어의 남동생이다. 캐서린은 재혼하면서 엘리자베스를 함께 데리고 간다. 그런데 토머스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행동이 심상치가 않았다. 엘리자베스도 싫지는 않았는지 애매하게 대응했고. 이것이 스켄들로 달궈지기 전에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를 먼 곳으로 보내 버린다.

이런 와중에 엘리자베스는 공부에 심취한다. 라틴어를 포한한 6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 고전에 심취했으며 역사 음악 등 왕실에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키웠다.

이같은 노력이 그의 재능과 만나 25세에 여왕이 된 후 당면한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해 나갔다. 추밀원을 중심으로 신교도와 가톨릭의 반목을 무마시켰고, 스페인과의 승리로 국가의 위상이 격상시켰고, 좀 살만해 지자 이에 걸맞게 예술을 적극 후원, 잉글랜드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래서 배출된 인물들이 윌리엄 세익스피어,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등이다.
왕위 계승, 결혼 등 국가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의견을 물어야 했던 약소국 잉글랜드. 이제 그들과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킬 발판을 마련해 준 엘리자베스 1세. “그대들은 나보다 더 좋은 리더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나보다 그대들을 더 사랑하는 리더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여왕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대신들에게 들려 준 마지막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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