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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에드워드 3세의 승전과 로댕의<칼레의 시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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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15>


적군의 두 배가 넘는 대군을 갖고도 배넉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왕이 일궈놓은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겨우 목숨만 건져 맨손으로 귀국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프랑스로 추방당했던 망명 귀족들과 손을 잡은 왕후의 반란으로 폐위, 감금 당했다가 온갖 고초를 당하다 죽는다. 그 온갖 고초 중에는 흙탕물로 면도를 해야 할 정도의 푸대접과 동성애를 조롱하기 위한 끔찍한 암살 방법 등이 포함된다.

이어서 왕위를 물려받은 에드워드 3세.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그의 아버지를 스코틀랜드의 명장 윌리스로 그렸지만 이는 순전히 흥미를 위한 헛소리일 뿐이다. 그의 어머니인 이사벨라는 프랑스의 왕족으로 윌리스가 죽을 때에는 겨우 열살이었고 그로부터 2-3년 후에 잉글랜드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3세는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를 닮아 영국 역사상 몇 안되는 명군 리스트에 등장한다.

그는 성년이 되어 어머니의 섭정에서 벗어나자 눈길을 프랑스 쪽으로 돌려 100년 전쟁의 물꼬를 텃다.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들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116년에 걸쳐 티격태격거린 전쟁들을 의미한다.

전쟁의 원인은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카페 왕조는 대가 끊기고 그의 큰 형의 외손자인 발루아가의 필립 6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라는 샤를 4세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카페 왕조의 후계라는 명분으로 왕위 계승을 주장하게 된다.

이런 왕위 계승권 문제가 아니더라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에 노르망디 왕조를 세운 그 옛날부터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미묘한 감정은 싹트기 시작했다. 그 후 플랜테저넷 왕조를 시작한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가져온 가스코뉴를 두고 영토 분쟁으로 번졌다. 이 와중에 프랑스 경제를 흔들기 위해 에드워드 3세는 그동안 플랑드르로 수출하던 양모의 공급을 중단해 버린 것. 이렇게 쌓이고 쌓인 악감정들이 필립 6세에게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져 백년전쟁이 터지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국이었다. 아니, 영국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연대기에 기록된대로 프랑스 국왕은 지상의 모든 왕 중의 왕이었다. 그의 위력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능가하고 아비뇽에 갇힌 교황의 보호자 겸 간수이기도 한 막강한 통치자였다. 우선 인구만 보더라도 프랑스는 영국의 다섯 배나 되는 2천 1백만 정도였고 병력 역시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필립6세는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첫 전쟁의 결과는 의외였다. 1346년에 치러진 크레시 전투(Battle of Crecy)는 잉글랜드의 1만 2천명의 병력이 3만의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압승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250명의 희생자를 낸 반면 프랑스군은 11명의 왕자와 1천5백여명의 기사가 포함된 1만명이 전사한, 세계 전쟁사에도 보기드문 대승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다면 잉글랜드가 반도 못미치는 병력으로 대승을 거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에드워드 3세의 치밀한 방어 전략이 필립 6세의 자만심을 꺾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치밀한 방어 전략은 노르망디를 거쳐 대륙으로 진군한 잉글랜드 군이 크레시 부근의 유리한 고지에 먼저 도착, 높은 곳에 진을 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편 필립 6세는 봉건시대의 전통적인 전략대로 제노바 용병으로 구성된 6천명에 달하는 석궁병을 앞세워 잉글랜드군이 기다리고 있는 고지로 오르막 행군을 한다.

그 당시 제노바 석궁병은 유럽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강력한 군단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들을 앞세운 필립 6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고. 하지만 웬일인지 크레시 전투에서는 선발대로 나선 석궁병들이 용맹스럽게 싸우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석궁은 특별한 훈련없이도 다룰 수있는 무기인 반면 한번 장전하려면 두 손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약 20초 정도가 걸리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전투 전에 내린 빗물에 불어 그마저도 제대로 작동시킬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항하는 웨일스 장궁은 장전하는데 5초면 충분하기 때문에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날아오는 잉글랜드의 장궁 앞에서 석궁병은 속절없이 무너지며 뒤에서 몰려오는 기마부대의 진군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 버렸다.

이에 당황한 필립 6세는 기마부대에게 명령한다.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석궁병들을 죽이고 진군하라. 육중한 갑옷 차림의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석궁병을 짓밟고 진군해 보지만 갑옷의 무게에 눌려 이마저도 힘들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장궁을 양쪽 가장자리로 쏘아 기병을 가운데로 몰리게 했다. 25Kg의 갑옷의 무게에 눌린 기사들은 진흙탕인 중앙으로 몰려 어기적거리다 기다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보병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C 에드워드 3세에게는 또 다른 전략이 있었다. 시골이나 도시를 가리지 않고 점령한 곳은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초토화 시키는 것. 민가에 들어가 모두 죽이고 약탈한 뒤 불태우고 떠나는 전략이다. 이 전술은 400년 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셔먼 장군이 조지아주를 공략한 전략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새까맣게 탄 대지 위에서 절규하는 비비안 리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조지아주가 아닌 해안도시 칼레를 위협하는 전략이었다. 이런 계략을 알고 있는 칼레 시민들의 저항이 1년 넘게 계속되자 에드워드 3세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칼레 시의 지도급 인사 6명을 나에게 보내라.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나머지 시민들은 살려 주겠다.’

이튿날 삐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를 비롯한 6명의 지도자가 자원했다. 그런데 마침 임신 중인 왕비의 애원으로 이들은 사면된다. 이같은 상류층의 희생정신은 Noblesse oblige라는 단어로,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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