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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스콘의 돌을 옮긴 스코틀랜드의 망치 에드워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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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13>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을 때 요즈음 젊은이들은 순 우리말로 즐겨 짓는다. 가람, 나래, 슬기, 겨리, 로운, 별이… 우리 때에도 한글 이름은 있었다. 돌쇠, 마당쇠, 막둥이, 언년이, 노랑녀…. 지금같이 한글 특유의 멋을 살린 것이 아니라 그냥 천 것에게 붙여지는 기능성? 이름.

일반 가정에서는 집안 서열을 뜻하는 항렬자에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한 한자 하나를 골라서 섞으면 된다. 아님 형제자매끼리만 공유되는 돌림자의 조합도 있고. 이렇게 우리를 포함한 동양 사람들은 뜻을 생각하고 서열을 따져 아기 이름을 얼마든지 새롭게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서양은 다르다.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조상이 쓰던 이름 중에서 부모가 좋은 것 하나를 고르는 것. 그렇다 보니 한 가문 안에서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일 수 있고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대체로 평범한 집안에서는 시니어(Sr.) 와 주니어(Jr.)로 구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왕족은 다르다. 선왕 중의 하나를 고르는데 역사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1세, 2세, 3세…로 이름 뒤에 꼬리표를 단다. 뒷꼬리가 길수록 성군이나 현군 또는 명군으로 인기 높은 왕일 확률이 크다. 오늘 소개 될 에드워드 1세는 무려 8세까지 이어진다. 사랑 때문에 왕관을 벗어 던진, 그래서 ‘뭣이 중헌디’가 저절로 나오는 그 에드워드 8세. 참고로 에드워드 1세의 할아버지인 존왕은 그냥 존. 꼬리표를 달 필요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에드워드 1세 이전에도 이 이름을 가진 왕이 세명이나 있었다. 웨식스 시대에 대 에드워드가 있었고 잉글랜드 왕국이 성립된 후에는 순교왕과 참회왕 둘 다 에드워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왕의 손자이며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부터 numbering이 시작되는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단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윌리엄 1세에게 정복당한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는 앵글로색슨 혈통이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혈통은 플렌테저넷 왕조를 시작한 헨리 2세로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부터 넘버링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에드워드 1세(1239-1307)는 왕세자 시절부터 아버지 헨리 3세를 따라 전장을 누비다 고모부인 시몬 드 몽포르에게 잡혀 투옥되지만 금새 탈출, 아버지를 다시 옥좌에 앉힌 용감한 인물이다. 6.2피트의 장신이기 때문에 롱다리 (Longshanks)라는 별명이 주어진다. 8차 십자군 원정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이탈리아 등지를 두루 살핀 후에야 돌아와 33세에 왕위에 오른, 배짱도 두둑한 인물이다.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방대한 법령을 재정비하고 개혁에 몰두했다. 우선 그동안 관행으로 내려온 관습법의 불합리한 점을 해결했다. 그리고 대대로 교황청에게 바쳐지던 세금을 잉글랜드로 빼돌려 막강한 교회 권력을 약화시켰다. 여기에 양모와 포도주 생산을 적극 권장, 국고를 가득 채우면서 중앙 집권화를 서서히 회복해 나갔다. 또한 영주들의 땅을 재분배, 귀족들의 세력도 분산시킴으로써 봉건 제도를 차츰 허물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간격을 좁히려 노력했다. 그 한가지 방법으로 오랜동안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던 프랑스어를 금지시키고 영어만 쓰도록 권장했다. 그리고 비록 시몽 드 몽포르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가 이룬 의회 운영법은 존중, 계속 실천하며 보완해 나갔다. 에드워드 1세의 이러한 노력으로 잉글랜드는 왕권이 강화되는 가운데서도 계급간에 생기는 정치적 문화적 갭은 서서히 좁혀지며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로 뭉쳐진 국력으로 주변 국가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에 이른다. 여태까지 잉글랜드의 왕들은 웨일즈 왕도 겸했지만 이름뿐 실권은 없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1세는 실권까지 장악하기를 원했다. 웨일즈 원정에 나섰고 그곳을 손에 넣은 후 카나번성(Caernarfon Castle)을 세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태자 에드워드 2세를 낳는다. 그래서 황태자를 Prince of Wales라고 부르는 전통은 여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국가의 상징으로 신성시되는 돌이 있었다. 스콘의 돌(Stone of Scorne)이라고, 여기서 스코틀랜드라는 나라 이름이 지어졌다. 이 돌의 귀중함은 창세기 28장 10절에 적혀있다.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에서가 하란으로 도망가던 중 벧엘 들판에서 베고 잤던 바로 그 돌이란다. 이 돌이 그리스 왕자에게 발견되어 이집트,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거쳐 스페인에서 천년을 머물다 한 공주에 의해 스코틀랜드로 옮겨졌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돌이다.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이 돌을 난싹 들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옮겼다. 그리고 사원에 있는 대관식 의자 아래의 공간에 모셔놓고 왕이 바뀔 때마다 깔고 앉기를 700년. 그동안 잉글랜드를 향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악감정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만 갔다. 이 덕에 그에게 별명 하나가 더 얹혀진다 <스코틀랜드의 망치>.

1950년 성탄절에 이 돌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살아졌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생들에 의해 도난당한 것. 이 대학생들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꿈꾸는 언약협회의 회원들로 엄밀히 따지면 도난이 아닌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 돌을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왔지만 1996년 다시 돌려 주어 지금은 에든버러 성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수군대고 있다. “진짜 돌은 숨겨놓고 가짜를 돌려준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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