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와 농노제 폐지를 초래한 와트 타일러의 난 >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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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봉건제와 농노제 폐지를 초래한 와트 타일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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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17>


100년 전쟁 중에 번진 흑사병으로 유럽은 인구의 1/3을 잃는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노동력 부족현상으로 이어지고 노동력의 감소는 농민들의 몸값을 하루가 다르게 뛰게 만든다. 몸값이 뛰면 사회적 자부심이 생기고 이 자부심은 경제적 자립심을 부추기기 마련이다. 전염병이 인력을 앗아갔지 농경지를 어쩌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손이 모자라 방치된 농경지는 널렸다. 이를 헐 값에 사서 소작, 또는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 어엿한 농장주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렇게 사회의 하층 계급이 희망을 품고 위를 향해 치고 올라오는 것에 비해 이들을 지배하는 상층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전쟁에 이긴다 해도 승전의 기쁨은 잠시, 귀국해 보면 잦은 출정으로 여기저기 빚을 진채 국고는 텅텅 비었기 때문에 무리한 세금을 거둘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대로 세금을 내야 할 농민들이 예전에 찍소리 못하던 농노들이 아니다. 당연히 힘을 합해 반항 세력으로 키워 반발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쟁에 패한 프랑스에서 먼저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두 배 이상이나 되는 병력을 갖고도 참패했고 더군다나 국왕까지 적국에 포로로 두고 왔으니 일반인들은 이리도 무능한 귀족들에게 예전처럼 고분고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용병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전쟁이 끝났는데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조직적인 떼도둑으로 변했다. 정부는 이들의 횡포를 막아 주기는 커녕 오히려 국왕 장 2세의 몸값을 모으기 위해 세금 폭탄을 매겼다. 1358년, 드디어 이에 대한 불만아 북부 프랑스에서 터졌다. 자크리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다.

영국의 경우 농민반란은 프랑스보다 약 20년 후인 1381년에 일어났다. 푸아티에 전쟁이 끝나고 브레티니 평화 조약을 맺을 때 잉글랜드는 승전국답게 프랑스의 1/3에 해당하는 드넓은 영토인 아키텐을 다시 돌려받았다. 여기에 더하여 프랑스는 이 영토에 한해서 종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대신 잉글랜드의 왕은 더 이상 프랑스 왕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성립되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그곳의 영주가 된다.

프랑스와의 휴전하는 동안 흑태자 에드워드는 스페인 카스티아의 잔인왕 페드로의 요청으로 직접 지원군을 이끌고 그곳에 가서 그를 도와 왕권을 복원시켜 준다. 그러나 페드로는 별명답게 흑태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중병까지 얻고 빈손으로 돌아온 흑태자는 1376년,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죽는다. 이로써 100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하는 일도 더 이상 없게 된다. 그래서 흑태자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받았던 왕자로 남는다.

그 이듬해에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까지 죽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 때 나이 겨우 11세. 그가 14세가 되었을 때 잉글랜드의 농민의 난인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다.

흑사병이 휩쓸고 간 잉글랜드는 전승의 기쁨도 잠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전쟁 준비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거덜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정부는 세금 징수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1377년에는 14살 이상의 남녀에게 인두세를 거두기 시작하여 2년 후에는 재산비례세까지 매겼다. 그러면서 조세율도 같이 올리다보니 1380년엔 3년만에 3배 이상의 세금을 바쳐야 했다. 당연히 백성들은 반발했고 이를 제압하는 세금 징수원들의 횡포도 심해져 갔다.

1381년 5월 어느날, 세금 징수원이 Wat Tayler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채 14살이 되지 않은 딸에게도 세금을 매기자 타일러 부인은 항의했다. 이에 화가난 징수원은 그 딸을 겁탈하려하자 모녀의 비명 소리가 진동했다.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버지 Wat는 그 자리에서 그 징수원을 때려 죽였고.

이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평소에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할 때 누가 귀족이고 누가 농민이었더냐>라는 설교로 마을 사람들의 반골의식을 자극하던 성직자 존 볼을 주동으로 집결한 무리들이 런던까지 행군하는 사이 그 무리는 10만을 육박하는 농민군이 되었다. 영국의 2/3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들은 감옥을 부수고 공문서를 불살랐으며 사보이 궁을 파괴했지만 약탈만은 삼갔다, 적어도 처음에는.

위기를 직감한 리처드 2세는 이들의 요구 사항들을 들어주었다. 그 요구 사항이란 국왕에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지금 세대부터 시작하여 후손에 이르기까지 농노제를 폐지할 것. 그래서 우리도 자유인처럼 시장과 공공장소에서 장사도 할 수 있게 해 줄 것. 농사를 계속할 경우 토지 임대료는 노역이 아닌 일정 금액으로 지불하게 할 것. 그리고 오늘 봉기한 농민군에 대한 죄는 일절 묻지 말 것, 등이다.

이들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 주자 대부분 귀향하였지만 일부 지도자들은 남아서 계속 추가 사항을 요구하던 중 왕의 시종들과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런던 시장인 윌리엄 월워스는 타일러를 칼로 찔러 죽이고 존 볼을 위시한 나머지 지도자들을 잡아 처형했다.
겉으로는 와트 타일러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것 같지만 지도자들의 희생으로 농민들이 얻은 것이 더 많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주들의 힘이 빠지면서 봉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면 상대적으로 국왕의 권력을 강화된다. 오늘날 영국의 절대주의의 길을 닦은 셈.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사건을 계기로 농노제 역시 서서히 퇴색되기 시작했다. 그 후 튜더 왕조가 성립되자 농노제는 공식으로 폐지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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