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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루즈벨트 만나고, 민영환의 자결을 애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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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6>


1904년 11월4일 스물아홉살의 이승만은 감옥 살이할 때 많은 도움을 준 부소장 이중진의 동생 이중혁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배에 올랐다. 이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일본 고베항에 입항했다. 목적지는 미국이지만 그의 배표는 여기까지. 그가 지닌 것은 가방 깊숙히 숨겨 둔 고종의 밀서와 19장에 달하는 선교사들의 추천서뿐, 더 이상의 여비는 없었다. 그러나 그곳 일본에서 포교 중인 선교사 로건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가는 배의 맨 밑바닥 3등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당시를 이승만은 <항해 첫 날은 거센 날씨로 하룻밤 동안 배는 캄캄한 바다 위를 헤매다가 첫 새벽에야 겨우 다시 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험난한 항해 끝에 11월 2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떠나온 조국은 음산한 겨울이지만 석 주 남짓 배를 타고 와보니 이색적인 야자수 잎새 사이로 내리 쬐는 햇볕은 한없이 따뜻했고 부두에 모인 윤병구 목사, 존 웨이먼 박사를 비롯한 동포들의 환영은 뜨거웠다. 아, 이것이  감옥에 있는 동안 머릿 속으로만 그리던 자유와 사랑이라는 것이로구나.


그 당시 기록에 의하면 하와이에는 남자 6,048명,  여자 637명에 어린이 541명 도합 7, 226명의 한인 교포들이 대부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도착한 날 이승만은 에와에 있는 한인 농장을 방문하고 국내 사정을 전해 주면서 독립을 강조하는 연설을 잊지 않았다. 연설을 들은 이들은 사탕수수 밭에서 혹독한 노동의 댓가로 얻은 돈을 추렴했다. 거금 6불에서 25센트까지 액수는 다양했지만 독립에 대한 염원은 똑같았다. 이렇게 모금된 30불로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는 시베리아호에 오를 수 있었고 그곳에 도착하여 남캘리포니아에 재학 중인 옥중 동지 신흥우를 만난다. 


가진 돈이 모자라 이중혁은 캘리포니아에 남기로 하고 혼자 대륙횡단 열차에 올라 섯달 그믐날 워싱톤에 도착했다. 거기서 친한파 하원의원인 딘스모어의 주선으로 당시 국무장관 존 헤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의 문호개방 정책을 내세워 중국 분할을 막은 유능한 장관이지만 이승만을 만날 때는 와병 중이었다. 한국 선교에도 큰 관심을 보이던 장관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적극 도울 것을 약속했지만 … 얼마지나지 않아 병사하여 그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승만의 첫 대미외교의 큰 좌절. 


한편 하와이에서도 윤병구 목사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살리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러-일 전쟁 마무리 작업인 포츠머스 회담이 열리기 한 달 전인 6월 어느 날, William Taft 육군 장관이 친선 사절단을 이끌고 동방 순례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렀다. 이 기회를 적극 활용, 윤병구 목사는 하와이 교포 4천명이 서명한 대한제국 독립 유지  청원서를 전달했고 그곳 감리교 선교회 존 와드먼 목사는 장관으로부터 이승만이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윤목사는 그 소개장과 한인들의 청원서를 들고 워싱턴의 이승만을 만난다. 이들은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찾아가 그 청원서를 한결 매끈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곧장 루즈벨트의 여름 별장이 있는 뉴욕의 롱아일랜드로 향한다. 이승만과 윤목사는 외교관 정장을 빌려 입고 그 해 8월 드디어 미국 대통령 Theodore Roosevelt (1858-1919)를 만난다. 청원서를 대강 흝은 대통령은 이를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미 국무부에 제출하라고 하며 자리를 뜬다. 옆 방에는 이들과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한 포츠머스 회담을 위해 미국에 온 러시아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 30분 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승만은 대한제국 독립 유지의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아 흥분했다. 접견을 마치고 나온 이들을 에워싼 기자들도 축하의 악수를 퍼부었다.  이 둘은 곧장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얼마나 흥분했던지 호텔 숙박료로 20달러를 내고 거스름 돈을 받는 것을 잊어 호텔 직원이 기차역까지 달려오기까지. 아마도 keep the change하기엔 너무 큰 액수였나보다.


워싱턴에 도착하니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자신들의 기사가 이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길로 대한제국 공사관에 찾아가 공사를 만났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은 여기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미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고 있던 공사 김윤정의 표정은 냉정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않은 이상 그 청원서를 미 국무부에 보낼 수는 없다고 잘라말하면서. 순진한 두 사람은 그런 그를 붙들고 늘어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찾아갔을 땐 문전박대를 당했다. 다시 찾아오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위협과 함께. 


이승만을 매몰차게 버리고 일본에 협조한 댓가로 주미공사 김윤정은 후에 전라북도 지사 자리를 얻어 분노한 교민들의 눈을 피해 몰래 귀국한다. 


이승만은 이 좌절과 실패를 민영환에게 알린다.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과 독립 유지 청원이 실패한 경위를 상세히 적었다. 이런 내용을 보고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실패담을 쓰고 있지만 애국심은 여전하다는 것을 전하기 위함인지 순 한글 가로쓰기로 작성했다.


그 후 고국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이승만을 비롯한 재미 한인 교민들을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이제 그나마 외교권도 잃었다는 소식. 그리고 눈물로 읽은 민영환의 답신.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활동비 300불이 동봉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들려온 비보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사흘간 식음을 전폐하며 비통한 눈물을 쏟게했다. 일본의 만행에 분개한 나머지 충정공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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