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독일 출신 조지 1세와 헨델, 영국에서 만나다 > 컬럼

본문 바로가기
미주지역 바로가기 : Calgary/EdmontonChicagoDallasDenverHouston,    TorontoVancouverHawaiiLANYSeattle

컬럼

문화·교육 두 독일 출신 조지 1세와 헨델, 영국에서 만나다

페이지 정보

본문

앤 여왕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위를 계승한 게오르크 루트비히, 조지 1세 (1660-1727)는 54세가 되기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 중의 하나인 허노버에서 자라고 그곳의 선제후로 활동했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 당시 유럽의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로 소통한다지만……  이러한 조지1세의 답답한 심정을 <먼나라 이웃나라>가 콕 찝어 준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난 영어도 모르고 영국 사정에도 어두우니 의회에서 니들끼리 수상도 뽑고 알아서 하거라. 난 가만 있을란다.” 이 내용을 젊잖게 표현하자면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는 하지 않는 영국식 의원내각제. 오늘날 영국의 모습 그대로다. 


1720년 당시 노예무역을 관장하던 남해회사의 주가 폭락으로 영국 왕실은 위기를 맞는다. 이 회사에 투자했다가 그 많은 재산을 왕창 잃은 아이작 뉴턴,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이 되는데,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군>이라며 푸념 했다고. 그런데 이 사건을 지혜롭게 해결,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인물이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이다. 그래서 조지 1세는 그를 초대 장경(총리)으로 임명하고 나라 살림을 맡긴다.    


 헨델은 1685년에 독일 할레에서 태어난다.  같은 해 음악이 대물림 된 집안에서 태어난 바흐와는 달리 헨델은 작센 궁정 소속 의사 겸 이발사였던 60대 아버지와 30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음악과는 거리가 먼 집안이다. 하지만 어린 헨델의 취미는 음악 감상. 그런데 집에서는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까 언제나 음악이 흘러나오는 예배당이나 대저택의 문밖에서 서성거리기 일쑤.  그러다 그는 오르간 신동으로 자란다.  


그런데 아버지는 법률가가 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할레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고 그 때부터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알바를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취미를 살린 알바가 전공보다 더 땡기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유언이니 어쩌랴. 가까스로 법학도 1년을 채운 후 곧바로 함브르크로 튄다. 함부르크에서는 겐제마르크 극장의 바이얼린 연주자로 일하면서 작곡하기 시작,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에 인생을 걸었다.  


1706년 헨델은 메디치 가문의 초청을 받고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탈리아는 음악의 종주국답게 거장들의 집합소. 극음악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발상지인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을 만나 그들의 영향을 흠뻑 받아 성장한다. 타고난 독일의 묵직함에 이탈리아의 경쾌함과 프랑스의 우아함을 섞어 감성을 자극하는 46곡의 오페라와 32곡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하면서 유학한지 4년만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것. 


그를 두고 여러 나라에서 스카웃 전을 벌였지만 그는 조국의 부르심에 응하기로 했다. 그 당시 하노버 선제후인 게오로그 루드비히 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궁정 악장이 된다.  단, 휴가는 맘대로 갖겠다는 조건을 붙여서. 이것이 문제였다. 하노버 궁정 악장이 된 그 해 6월 휴가 차 런던으로 향한다. 막상 런던에 와보니 완전 딴 세상. 세계 제 1인자인 내가 설 곳은 하노버 촌구석이 아니라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만큼 무대는 넓고 할 일은 많았다. 


이듬해에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토르쿼토 타소가 1차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쓴 <해방된 예루살렘>을 소재로 오페라 <리날도Rinaldo>를 작곡했다. 사라센 왕이 마술 궁전에 갇힌 주인공에게 작업거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울게하소서>. 이 아리아의 내용은 날 좀 내버려 두라는 뜻이고, 트로트 버전으로는 ‘어마나, 어마나, 이렇지 마세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감성은 변하지 않는가보다. 이 오페라가 대박을 쳐 그간 쌓은 그의 명성에 부귀까지 보태진다. 아무리 조국이라지만 그 촌구석에 가야하나…

그래도 일단 귀국은 했다. 계약은 계약이니까. 하지만 한번 맛 본 대성공의 단맛은 잊을 수가 없는 헨델. 그래서 염치없는 것 알지만 이듬해인 1712년 어느 가을날, 적당한 시기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또다시 런던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적당한 시기는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 1세가 되어 영국의 국왕으로 부임할 때까지, 아니,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때까지 계속 되었다.


헨델은 조지 1세가 품었을 괘씸죄를 용서 받기 위해 몇 차례 알현하려했으나 번번히 거절, 사죄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회는 왔다. 왕이 템즈강에서 뱃놀이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그래서 잽싸게 <수상음악>을 작곡한다. 그리고 뱃놀이하는 날, 헨델은 챔발로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총동원, 50명의 연주자와 함께 다른 배에 올라 왕과 귀족들이 탄 배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수상음악>을 초연했다. 이에 대한 조지 1세의 반응은? 앵콜을 두 번이나 연발하는 바람에 렘버스(Lambeth)에서 첼시(Chelsea)까지 오가는 동안 무려 3번이나 연주했다고. 


<수상음악>은 F 장조 348번에는 11곡, 그리고 D장조349번과 G장조 350번에는 각각 5곡씩 있는 소곡들을 모은 3개의 모음곡이다. 야외 행사용, 특히 물놀이용이니까 혼과 트럼펫 같은 금관악기와 플륫, 오보에 같은 목관악기들의 연주가 두드러진다. 과연 헨델답게 밝고 화려한 화성과 출렁이는 리듬이 일품이다. 그간 조지 1세가 헨델에게 품었던 앙금을 싹 거둬내기에 충분한 리듬. 


 앙금이 말끔히 씻긴 조지 1세는 앤 여왕이 헨델에게 지급한 연봉을 두 배로 올려 400파운드를 주며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왕실의 보살핌 속에 승승장구하던 헨델은 말년 들어 건강을 잃은데다 펜덤도 잃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고전 오페라에 식상한 것. 그래서 작곡의 방향을 틀어 하나님에게 집중했고 마지막 역작으로 남긴 불후의 명곡이 <메시아>.  이 때 벌떡 일어난 국왕은 조지 1세가 아닌 그의 아들 조지 2세.  조지 1세는 이미 고국에 뼈를 묻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Login

회원가입
이번호 신문보기 더보기

회사소개(KOR) | 광고&상담 문의
9219 Katy Fwy #291. Houston TX 77024
TEL. 713-827-0063 | E-MAIL. houstonkyocharo@gmail.com
Copyright © The Korea World News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or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팝업레이어 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