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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노르망디의 사생아 윌리엄, 영국 왕실의 조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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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6)


데인족 출신 크누트가 죽자 잉글랜드의 <데인 왕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크누트가 선정을 베풀어 잉글랜드에 평화와 번영을 안겨 주었지만 그가 죽자 왕권은 다시 앵글로색슨 계열로 이어진다. 그래서 왕이 된 인물이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그는 에마의 첫 남편 에설레드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별명이 말해 주듯 왕위에 올랐지만 정치에는 관심없고 종교에만 심취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어머니 에마와 장인 고드윈의 손안에서 좌지우지 되었다.  별명이 말해 주듯 그가 자식도 없이 죽자 고드윈은 자기의 아들 해럴드를 왕으로 삼는다. 이 해럴드가 노르망디의 윌리엄에게 정복당하면서 잉글랜드에 노르망디 왕조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고로 지금의 찰스왕은 윌리엄의 33대손. 

정복왕 윌리엄이란 별명이 말해 주듯 그의 일생은 투쟁에서 시작하여 투쟁으로 끝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 파란만장은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대체로 영미권에서는 그를 난폭하게 정복하고 냉혹하게 통치한 인물로 그리지만 프랑스어권에서는 그를 다르게 본다.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가며 노르망디 공국의 난세를 평정한 입지적 군주, 면적으로보나 국력으로보나 인구로보나 몇 배 더 큰 잉글랜드를 완전 정복한 영웅으로 떠받든다.  이도저도 아닌 우리는 이 두 시각을 대충 섞어서 가늠할 수 밖에.

9세기 프랑스에 바이킹(노르드인)이 쳐들어와 마구 약탈하자 샤를 3세는 이들과 싸워서 힘 빼지말고 땅 한 곳을 떼어주고 봉신으로 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바이킹의 두목 롤로에게 떼어준 땅이 센느강 하류의 노르망디 지역. 그 두목이 정복왕 윌리엄의 고조할아버지다. 


 윌리엄의 아버지 로베르 1세는 강가에서 빨래하던 무두장이의 딸을 보고 반했다. 그래서 얻은 아들이 윌리엄이다. 그런데 로베르 1세 공작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비록 사생아였지만 윌리엄을 후계자로 공표해 놓고 예루살렘 순례길에 올랐다. 그런데 귀향길에 갑자기 죽게 되자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작이 된다. 그 때 나이 겨우  일곱살. 


사생아가 후계자가 되는 것도 문제였지만 어린이였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조롱과 암살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외가의 비천한 가문을 조롱하기 위해 성벽에 무두질한 가죽을 걸어 놓는가 하면 숙부들이 형의 사생아를 정식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죽이려 했다. 이 때 프랑스의 왕 앙리 1세를 비롯하여 대주교와 아버지의 충신들, 그리고 외삼촌 월터, 등이 보호해 준 덕에 노르망디판 단종애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15세가 되어 기사 작위를 받게 되자 더 이상의 암살 시도는 없었고.  


20대에 들어선 윌리엄은 명문가와의 결혼을 통하여 신분도 상승시키고 그 지긋지긋한 사생아 딱지도 떼고 싶어했다. 그래서 눈에 들어온 규수는 플랑드르(Flanders)의 공녀 마틸다. 청혼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때 돌아온 대답은 ‘흥, 사생아에게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수녀가 되는 게  낫겠다.’  윌리엄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 이에 눈이 뒤집힌 윌리엄은 그 즉시 말을 몰고 플링드르(지금의 네덜란드 영지)로 향한다. 


마침 교회로 향하던 마틸다와 마주치자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진흙 구덩이에 처박고 돌아와 또 청혼. 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이번에는 그의 집으로 달려가 또 똑같이 폭행. 이를 본 아버지 보두앵 5세는 칼을 들고 나오자 마틸다는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 남자와 결혼하겠으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 마틸다의 이상형이 마초같은 나쁜 남자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4년 후에 결혼한다. 그리고 아들 넷, 딸 다섯을 낳았다. 그들 사이에 사생아는 없었다.  


윌리엄이 다스리는 노르망디 공국이 점점 강력해 지자 그동안 그를 보호해 주던 프랑스의 앙리 1세는 위협을 느껴 두어번 침공했으나 두 번 다 실패했다. 이러다가 프랑스의 왕위까지 넘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해 본다. 그러나 그 걱정꺼리는 먼 훗날 윌리엄의 후손에 의해 100년전쟁으로 드러나지만 그 당시 윌리엄은 프랑스보다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아니,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잉글랜드의 죽은 에드워드도, 당시의 왕 해럴드도 옛날에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자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윌리엄 혼자의 주장이지만서도. 


그래서 그는 용병을 모으고 함대도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출정하려 했는데 마침 도버해협에 부는 바람이 너무 세서 잠시 출정을 연기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것. 때 맞춰 노르웨이가 잉글랜드의 북쪽을 침공했고 이에 헤럴드가 응전, 스탬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것이 윌리엄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픈 격. 노르웨이라는 또다른 경쟁자가 적군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해럴드가 군대를 재정비할 틈을 주지않고 윌리엄은 곧바로 남쪽에서 밀고 올라가  승리, 3일 만에 잉글랜드를 접수했다. 이것이 영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그 유명한 The Battle of Hastings다. 헤럴드는 전사하고 정복왕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갖고 소원대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영국에는 로마가 철수한 5세기 이후부터 계속 이어진 앵글로색슨 왕조가 무너지고 새롭게 노르만 왕조가 시작된 것.   

   

머리에 잉글랜드의 왕관은 빛났으나 불과 2만명의 노르만인으로 2백만의 잉글랜드를 통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잉글랜드 전역에서 반역의 기미가 보였지만 특별히 데인로 지역의 덴마크인들의 저항이 거셌다. 사실 이들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같은 노르드(북쪽 사람) 바이킹이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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