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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너무 다른 동시대 풍경화가 J.M.W 터너와 존 컨스터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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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57>


대체로 유럽의 미술은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네덜란드 출신의 거장들이 중심이 되어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 왔다. 그 분야에서 영국은 아무래도 약했다. 그런데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서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화의 두 거장 J.M.W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와 존 컨스터블(1776-1873)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앞거서니 뒷서거니해서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풍경화의 대가라는 것뿐 출신 배경 외모 기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폭에 담을 자연에 대한 시각이 판이하게 달랐다.


이 둘은 우선 출신부터 달랐다. 윌리엄 터너는 런던에서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미술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일찌감치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0대에 런던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고 20대에 왕립미술원 정회원이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성서나 신화 또는 역사에 나오는 장면을 그린 역사화나 귀인의 얼굴을 그리는 초상화가 대세였고 풍경화는 한 수 낮은 장르로 여겼다. 그래서 윌리엄 터너는 풍경화에도 무언가를 압도하는 위엄과 빛의 신비로움을 담기로 마음 먹었다. 보이는대로 세세하게 그리기 보다는 인위적인 요소를 압도하는, 자연이 뿜어내는 장엄함을 화폭에 담아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로. 


1628년에 로마에 정착한 클로드 로랭. 폐허로 변한 유적을 바라보며 브리튼 공주 우르슬라의 죽음을 그곳에 섞어 넣고, 떠오르는 태양 빛에 새벽 안개가 부서지는 시적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성 우르슬라의 출항>.  이 작품을 보고 ‘바로 이거다’라고 외쳤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이 그림에 엄청 감동한 윌리엄 터너는 이 때부터 클로드 로랭에게 자신의 미래를 걸기로 결심, 열심히 습득했다. 


그리고 자연의 숭고함이 담긴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매년 여행을 떠났다. 베네치에에서는 새벽 안개를 품은 대기의 색채를 관찰했고. 자연의 거대한 힘을 직접 체험하고 그 힘을 그림 속에 표현하기 위해 폭풍이 휘몰아치는 뱃머리에 자신을 묶고 버티기를 4시간! 그것도 67세의 고령으로. 그래서 나온 작품이 <눈보라 - 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호가 하위치 항을 떠나는 밤의 눈보라 속에 있었다>이다. 


이렇게 긴 설명이 곁들인 제목을 읽고도 성난 파도 속의 배를 얼른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광풍이라 생각하고 보면 떠올려자는 문구는 있다. <바다라는 광대한 수의는 5천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쉬지 않고 굽이쳤다>라는 모비 딕의 마지막 문구.  <터너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작품>, 또는 <비누 거품과 석회 반죽뿐인 작품>이라는 멘트가 이 파격적인 그림에 대한 비평이다. 이에 대한 터너의 대답은 당당했다. <이 그림은 이해하라고 그려진 것이 아니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우, 거칠게 출렁이는 겨울 밤바다의 느낌을 느껴보라고 그렸을 뿐.> 하지만 극찬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존 컨스터블은 곡창지대인 Suffolk에서 제분업을 하는 지방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공자다운 잘 생긴 풍모를 지닌 그의 아들이 미래가 불투명한 화가가 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 보다는 자신의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겠지. 하지만 존은 23세에 왕립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터너와는 달리 50대가 되어서야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는 대기만성형 화가가 된다.  


같은 자연을 보고 같은 장르의 풍경화를 그렸지만 화폭에 담을 자연을 보는 시각은 윌리엄과 판이하게 달랐다. 존 컨스터블은 윌리엄 터너가 생략해 버리는 자연의 세미한 부분에 집중했다. 특히 고향 주변의 시골 풍경을 너무나도 사랑해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주변 농부들의 소소한 일상을 보이는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광풍의 느낌을 화폭에 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생고생을 사서 하는 윌리엄과는 달리 컨스터블은 <물레방아 소리와 버드나무, 낡은 판잣집, 진흙투성이가 된 마차와 다리….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한다. 이런 풍경들이 나를 화가로 만든다>라고 했으니 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런 생각이 잉태하여 태어난 작품이 영국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풍경화 <건초 마차 The Hay Wain>이다.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가업 주변에 널린 풍경들, 방앗간, 농장, 낙싯터, 건초장, 들판, 작은 개울, 그 주변에서 초록 빛을 뿜어내고 있는 나무, 이 목가적 분위기를 부드럽게 품어주는 푸른 하늘의 뭉게 구름, 등을 세세하게 그렸다.  


영국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 그림에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풍조였던  풍경화에 대한 푸대접도 한 몫했겠지만 그보다는 윌리엄 터너가 그려내는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 비해 존의 그림은 너무나도 평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1821년 파리의 살롱전에서 금상을 획득하게 되자 영국인들의 시각도 달라졌다. 그동안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 문명에 휘둘려 바쁘고 고달픈 도시 생활에 시달리다가 이 그림을 보자 문득 멀리 두고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자극되었는지 영국인이 꼽은 최고의 전원 풍경화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두 화가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이 둘의 그림은 마침 보블전쟁을 피해 영국에 머물던 프랑스의 모네, 피사로, 시슬레를 감동시켜 프랑스 인상주의의 탄생을 도운 산파역을 훌륭히 해 냈다는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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