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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그레이트 브리튼의 첫 국왕이 된 제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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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32>


잉글랜드를 위해 일생을 바친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계 후계자가 없다. 그래서 1603년 조카 제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제임스 6세는 제임스 1세(1566-1625)가 되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를 아우르는 최초의 영국 (Great Britain) 국왕이 된다.


 따라서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도 변했다. 잉글랜드 기와 스코틀랜드 기가 합처 져 최초의 유니온 기가 생겨났다. 참고로, 지금 사용되고 있는 영국기는 1801년에 Ireland의 세인트 페트릭 십자가가 여기에 합쳐 진 것이다. 이것을 들고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이 국기를 꽂고 그곳을 제임스 타운이라고 명명했다. 후에 이곳을 중심으로 13주가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지금의 성조기에는 열세개의 줄무늬가 새겨진 것이고.  


 여기서 잠깐, 제임스 1세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의 생애를 잠시 들여다보자. 프랑스의 명문가 출신과 결혼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두 명의 왕자를 얻긴 했으나 모두 어려서 잃고 세번째는 공주를 낳았다.  크게 실망한 왕은 ‘우리 왕조는 딸로 시작해서 딸로 망하겠군’ 하고 불평하다 딸이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 딸 Mary Stuart(1542-1587)는 태어난지 9달만에 스코트랜드 여왕이 되고 프랑스 출신 어머니에 의해 6살에 프랑스로 보내진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서 프랑스 궁정 교육을 받은 메리는 열다섯살이 되자 황태자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한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겸 프랑스의 왕비가 된 메리는 꽤나 도도했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무시했다. 그의 시어머니 Catherine de Medici는  3명의 자식을 다 왕으로 군림시킨, 근세 유럽사를 상징하는 불세출의 여걸. 하지만 며느리의 눈에는 그저 <피렌체의 장사꾼> 출신일 뿐 왕족이 아니다. 이 틈새에 끼어 시달리던 남편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년만에 죽는다. 시어머니에게 쫓겨나다시피 스코틀랜드로 귀향한 메리는 두어번 더 결혼하고 제임스를 낳았다. 살아 생전에 엘리자베스1세의 왕위를 끊임없이 위협하다 결국은 단두대에 목을 드리우게 되고. 


 제임스 1세가 즉위할 당시 잉글랜드는 가톨릭, 성공회, 청교도 등 세 집단으로 나뉘어 새 왕에 대한 기대치가 각기 달랐다. 그 중에서도 그동안 숨죽이고 지내던 가톨릭이 새 왕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새 왕의 어머니 메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을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리기에는 그동안 세력을 키워온 성공회의 세력이 너무도 단단했고 그 당시의 분위기 또한 험악했다.    


 그 험악한 분위기란 반가톨릭 정서.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을 때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 때 스페인과 벌인 싸움에서 이기긴 했지만 그 후유증은 패전국인 스페인 보다 더 심각했다. 스페인은 가톨릭의 종주국이기 때문에 그 후유증을 앓으면서 반가톨릭 정서도 더욱 부풀려진 것. 개신교 신자들은 엘리자베스 1세 때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세력을 계속 누르기를 원했고 가톨릭 신자들은 이 기회에 다시 일어서기를 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임스 1세는 그의 타고난 peace maker기질을 발휘했다.  <나는 영혼이 오류에 빠졌다고 그 육신을 벌할 생각이 없소>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가톨릭과 개신교 두 종파간에 서로 싸우기 보다는 화합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훗날 딸은 개신교 국가로 시집보내고 며느리는 가톨릭 국가에서 데려오는 것을 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현실적인 유화 정책은 세 종파 모두에게 불만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불만은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진다. 이들은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 당시 국회를 주도하고 있던 세력은 청교도와 성공회였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 Guy Fawkes 가 주동이 되어 국회 의사당 지하에 화약을 쟁여 놓은 것. 그런데 거사 직전에 한 밀고자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것이 1605년 가톨릭 교도인 가이 포크스에 의해 불발된  화약 음모 사건이다. 


 의회는 이듬해 11월 5일을 Guy Fawkes Day로 정하고 가이 포스크의 가면을 쓰고 불꽃놀이를 하는 전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면은 무정부주의의 저항으로 변질된다. 영화 <V for Vendetta>에 잘 묘사되어 있다. 


 제임스 1세의 평화주의적 유화정책은 이렇게 실패로 끝난다. 더군다나 10여년이 지나서는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개신교 신자를 사위 삼은 것도 실패의 화근이 되었다. 1618년, 사위인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신성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보헤미아의 왕위를 수락한 것이 30년 전쟁의 불씨가 된다. 이제 유럽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정면 충돌하는 상황에 이른 것. 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스페인 왕에게 SOS를 친다. 이에 국내에서는 갈뱅파들이 주축이 된 개신교도들은 당연히 사위 측에 서서 보헤미아를 도와야 된다고 하자 여태까지 스스로를 평화적 중재자로 생각하던 제임스 1세의 입장이 난처해 졌다.


 그러나 타고난 평화주의자 제임스 1세는 무력 대신 협상으로 해결하려 했다. <사위 프리드리히를 건드리지 않으면 당신들과 우호관계를 맺을 의향이 있다>는 내용을 스페인에 전달했다. 그러면서 회담이 결렬되어 어쩔 수 없이 무력 행사를 하게 될 경우에 대비, 의회에 전쟁 자금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것이 의회와 충돌하게 된다. 협상한다면서  전쟁 자금은 왜? 하고 되묻자 하원과의 관계가 틀어져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청교도들에게는 영국 성공회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일이 이렇게 번지자 1620년 청교도들은 May Flower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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