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전도 교육 사업에 전념 > 컬럼

본문 바로가기
미주지역 바로가기 : Calgary/EdmontonChicagoDallasDenverHouston,    TorontoVancouverHawaiiLANYSeattle

컬럼

문화·교육 귀국 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전도 교육 사업에 전념

페이지 정보

본문

<우남 8>


자신은 고국에 돌아가서 할일도 많고 고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 박사학위를 빨리 받아야 한다며 프린스턴 생활을 시작했던 이승만 학생. 그로부터 2년 후, 막상 졸업을 눈 앞에 두고보니 그 할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한다. 5년 전 미국에 올 때는 그래도 한 왕국의 밀사 자격으로 들어와 미국의 대통령까지 만났지만 막상 박사가 되어 이제  귀국하려니 그 볼품 없는 조국의 실낫같은 명맥마저 끊어진 상태. 돌아갈 고향은 있지만 그간 연마해 온 국제정치 지식을 펼칠  조국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프린스턴에서의 마지막 학기 중에 뉴욕으로 향한다. YMCA 국제위원회 위원장 John R. Mott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모트 박사는 훗날 기독청년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는 이승만에게 귀국하여 1903년에 창립된 경성 YMCA인  황성기독청년회를 위해 일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어서 경성 YMCA의 Phillip L. Gillett총무로 부터 취업 초청장이 배달되었다. 직책은 질레트 총무와 동등한 직급인 Chief Korean Secretary, 월급은 150엔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금액은 연봉 $900으로 당시 6-800불을 받던 선교사들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결심한다. 고향에 돌아가 자신이 미국에서 받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교육을 펼침으로써 방황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일깨우겠다는 결심. 그래서 박사학위 받은 바로 그 다음날인 1910년 7월 19일, 취업 수락 편지와 함께 귀국 준비에 쓰일 비용 $180을 가불 신청하면서 짐을 꾸린다.    


언제 또 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미국을 벗어나기 전 우선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 사는 옥중동지 박용만을 찾아가 작별을 고한다. 그런 후 뉴욕 항에서 영국으로 떠나는 기선 발틱호를 탔다. 

일주일만에 영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유럽의 대도시를 대충 둘러 본 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고작 180불을 가지고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그 옛날 이야기. 


그리고 만주 벌판을 거쳐 압록강 다리를 건넌다. 이 때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밟으며 비로소 망국의 설움을 현실로 실감한 10월 10일 어둑어둑해질 무렵, 남대문역(사진)에 도착한다. 


이름은 남대문 역이지만 위치는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지금의 이화여고 정문 쯤이란다. 참고로 정겨운 덕수궁 담을 끼고 도는 정동에 있는 교문은 이화여중 구관 입구.     


괄괄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복역 중일 때 따뜻한 솜옷도 만들어 차입시켜 주고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는 상소문을 써 들고 경운궁 앞에서 통곡하며 구명운동을 벌이던 아내가 보고 싶다. 그 아내를 그리며 이런 시도 지어 보냈었지. <규방의 세월일랑 빨리 흐르게 하지마라 / 짝 잃은 새는 잠 못 이루어 달 밝은 밤인데 /  먼 고향의 가을 싣고 돌아가는 기러기 / 늘 그립고 괴로울 때 채련곡을 노래하고 / 몇 번인가 버들 잎 새로운 누각에 올랐다가 시름만 더해질뿐 / 물어보노라 타향살이는 이렇게도 초라한 것인가 / 이별의 한이란 사람으로 거두어 들이지 못 할 어려움>


동대문 밖 낙산 중턱에 자리잡은 본가에 들어선다. 6년만에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74세의 아버지는 며느리 박씨와의 이혼부터 서두른다. 이럴 때 당연히 달려나와 안겨야 할 7대 장손 태산을 미국에 보내 죽게 한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이런 일이 야속했지만 그래도 때맞춰 제사 지내고 남편도 없는 집에서 홀시아버지를 모셨는데….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YMCA 3층에 방 하나를 얻어 나온다. 훗날 대통령이 된 우남을 몰래 비서를 보내 박씨의 행방을 알아보라 했단다. 용돈이라도 주고 싶다면서.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비참했다. 한 때 이승만의 아내였기 때문에 인민군에게 그 자리에서 총살 당했다는 소식. 


복잡한 집안 일을 잊으려는 듯 우남은  미친듯이 일했다. 그가 YMCA 국제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 보면 그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 주일마다 바깥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오후에는 지속적으로 바이블 클라스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주일에 9-12시간은 청년회 학교를 찾아가 강의를 합니다. 다른 학교에 가서 수시로 하는 짧은 강의 외에도 청년회 학교 생도들만을 위한 주 3회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전국 YMCA net work를 형성하고 틈만나면 번역 사업에도 몰두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YMCA는 이승만의 귀국 소식을 들은 옥중동지들,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개화된 지식인들의 아지트로 변했다. 


마치 10년 전 독립협회의 축소판 같았다. 이렇게 만난 동지들과 재밋는 사진도 찍었다. 자신을 초청한 Gillett 총무를 꼭대기에 세운  후 자신 앞으로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동지들을 세운 사진.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기인데도 이들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YMCA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성의 YMCA는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 심지어 일본 등지에 있는 YMCA와 든든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순사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일종의 치외법권과 같은 혜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Login

회원가입
이번호 신문보기 더보기

회사소개(KOR) | 광고&상담 문의
9219 Katy Fwy #291. Houston TX 77024
TEL. 713-827-0063 | E-MAIL. houstonkyocharo@gmail.com
Copyright © The Korea World News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or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팝업레이어 알림